20-05-10주일설교_매순간 선택하는 생명 (창세기 6:1-3, 5-8)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May 10, 2020
- 9 min read
Updated: May 11, 2020
요즘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상으로 퍼지고 있는 것처럼, 노아 때의 홍수도 지구 전체가 온통 물로 덮여서 일년 가까이 물 속에 잠겼던 사건이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지난 반년 간 전세계에서 28만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냈습니다. 노아 때의 홍수는 노아와 그 식구들 8명만 남겨 놓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쓸어가 버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짐승과 새들도, 방주 안으로 들어간 것들 외에는 모두 죽었습니다. 요즘 온 세상이 무서워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도 이만한 파괴력은 갖고 있지 못합니다. 방주가 아니었으면 노아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생물은 영원히 멸종되었을 겁니다. 이 홍수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 이었습니다. “내가 이제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창세기 6:17)
이 무섭고 끔찍한 홍수의 재앙은 무엇 때문에 일어난 건가요? 천지를 지으시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으셔서 존재케 하시고, 모든 초목과 과목에게 생명을 주셔서 자라고 또 열매를 맺게 하시고, 모든 짐승과 물고기와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무슨 일 때문에, 모두 다 쓸어 없애시려는 마음을 갖게 되신 걸까요? 도대체 노아시대 사람들은 어쩌다가 모두 이렇게 쓸어 버림을 당하게 된 걸까요? 그들이 이럴만큼 더이상 살만한 가치가 없었단 말인가요? 어이없지만, 바로 그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도데체 무슨 잘못을 어떻게 얼마나 저질렀기에 하나님이 쓸어 없애야겠다고 결정하실 만큼 존재가치를 잃게 된 건가요? 하나님께서 높은 뜻을 위해 창조하신 사람들이 지상에서 존재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더 이상 두고 보실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썩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창세기 6:1-3)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사람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땅 위에서 살아도 마음은 하나님과 그분이 계시는 하늘에 두고, 영의 이끄심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명하고 기대하셨는데, 이들은 마음을 땅에 두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은 관심 밖에 두고, 오로지 안목의 정욕과(“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육신의 정욕을(“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따르는 삶을 선택한 인간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그들에게 주셔서 그들 안에서 영원토록 있게 하려 하셨던 마음을 바꾸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또 당시 인간 평균 수명이었던 856년에서 736년을 삭감하여, 그때부터는 인간 수명 평균을120년으로 제한시키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120년 이상을 지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 살만한 인물도 못되고,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판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엄청난 손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관심 밖으로 던져 버리고 오로지 정욕을 따르는 삶을 선택했던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버린 것이었고, 자신의 생명의 길이도 자신 스스로가 엄청 잘라 버린 겁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르는 삶을 선호하고 택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복과 그 근원을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이 의도했던 성품과 정반대되는 성품으로 변해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이었다고 하나님은 진단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온 세상을 죄악으로만 가득 채워놓았다고 증언하십니다. 이 것을 보신 하나님은 가슴을 치며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 후회와 아픔이 자리를 잡고 하나님을 괴롭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라고 기대하셨던 인간과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지음을 받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였던 인간이 천한 모습을 보이고, 악한 행동만 일삼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을 지상에 허락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지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실 계획을 세우신 겁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창세기 6:5-7). 이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을 다 죽여 없애 버릴 계획을 세우실 정도로, 추악하게 변한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에 헤아릴 수 없이 깊은 후회와 아픔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의 고통과 후회의 배후에는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 때문인 것 외에 더 중요한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이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이들을 위한 그 어떤 소망도 안 보이셨던 겁니다. 혹시라도 이들 중에서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소원하는 사람은 없는지 온 지구를 돌고 또 돌면서 샅샅히 뒤져 보아도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하셨던 겁니다.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탄식하게 했고, 후회와 슬픔을 갖게 해드렸던 겁니다. 모두가(노아 한 사람만 빼고) 하나님을 등지고 “제 갈 길로 흩어”진(이사야 53:6) 모습 뿐이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모두 하나님도 구원해 내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 건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자신들을 찾아 오셔서 구원하실 수 있는 기회와 틈을 전혀 드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구원해 내실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고향에 계실 때에는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믿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다른 지역에서 하실 수 있으셨던 많은 능력을 자기 고향에서는 하실 수 없으셨다고 마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5-6).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한번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상태에 깊이 빠져 있던 이 때의 사람들의 모습과 그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로마서 3장10-18일 겁니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노아 한 사람만 빼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새 마음을 갖고 새롭게 의의 길을 갈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노아 외에 의인 한 명만이라도 더 찾으실 수 있으셨다면, 온 세상은 홍수의 심판을 면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을까요? 그럴 수 있었을 겁니다. 이건 억지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죄로 차고 넘친 예루살렘을 멸하셔야만 했던 하나님이 이 일을 정말로 실행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이 멸하심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것에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이 제안하신 방법은 예루살렘 도시 안에서 의로운 마음을 갖고 의롭게 사는 의인을 한 사람만이라도 찾아 낸다면, 그 성을 용서하고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예레미야 5:1). 아브라함은 소돔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시던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서든 조카와 더불어 소돔성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보고자 모든 설득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도록 대화를 유도했습니다. 소돔 성에 의인이 50명이 있는 것이 발견된다 해도 그 의인들을 모든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실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런식으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면서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여쭤본 의인 수가 1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단계적으로 의인의 수를 줄여가면서 그 만한 수의 의인이 소돔 성에 있는대도 그들을 악인들과 함께 멸하실 거냐는 질문을 받으실 때마다, 하나님은 한결같이 긍정적인 대답을 주셨습니다. “의인 50명만 찾을 수 있으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그 성 전체를 용서하겠다 . . . 거기에서 45명만 찾아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 . .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 . . 거기에서 30명만 찾아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 . . 20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 . . 10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대답 속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돔 성의 전체 인구가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대답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입니다. 어느 도시든지 아무리 죄악으로 넘치는 곳이라도, 그 곳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이 살고 있으면, 그 수가 50명이든, 또는 단 1 명이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멸하고자 계획하셨어도, 하나님의 그 마음이 누그러지고 바뀌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노아 시대의 전 세계 사람들 사이를 샅샅이 뒤지며 살펴 보셨을 때, 노아 한 사람 외에는 또 다른 의인을 한 사람도 더 찾아 볼 수 없으셨던 것은 정말 슬프고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혹시라도 노아 외에 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홍수재앙을 면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때 사람들 중에는 지구 전체를 샅샅히 뒤지고 보았어도, 노아 외에는 단 한 사람의 의인도 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시대 전 인류가, 노아와 그 식구들 8명과 방주 안에 있는 동물들을 제외하곤, 하나님의 진노의 홍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롯은 아브라함보다는 훨씬 못한 의인이었어도 성경은 엄연히 그가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후 2:7). 롯이 소돔에 살았는데, 소돔에는 롯 외에 다른 의인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돔은 멸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인 롯은 그 두 딸과 함께 소돔을 빠져 나와서 멸하심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 롯의 모습과 그 때 상황이 노아와 그 시대 상황하고 흡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롯과 노아는 의인이었어도 당대의 사람들이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단지 자신들과 자기 식구들의 목숨만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노아 시대 사람들과 소돔 성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한 구제불능의 구렁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사실에 입각하여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함께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좀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실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추하고 악한 모습으로 변질된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찔러 들어와서 고통스럽게 해드린 이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바로 인간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 안으로 빠져 갇혀 있는 사실을 보셨고, 이것에 대해 하나님도 도우시고 구원하실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에 슬퍼하시고 탄식하신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추하고 악한 모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 마음에 조금이라도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악에 대해 뉘우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반기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겉으로는 아름답고, 준수하고, 훤칠하고, 깨끗하고, 건강하고, 부요하고, 멋있고, 늠름하고, 실력과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생각은 자신은 전혀 누구 앞에서도 꿀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났으면 잘났지, 못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다른 사람보다 앞에 서야 하고 위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 때문이라며 남에게 책임을 돌이고, 남을 탓하면서, 잘 한 것들에 대해서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서 그런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자랑하며 교만스럽게 행동하는 사람. 자기는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고, 자신은 늘 다른 사람의 피해자이고, 자신도 남들이 갖고 있고 누리는 모든 것을 갖고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자신 속에 어리석음과 교만이 있고, 자기고집만 주장하는 이기심이 있고, 인격과 생각과 행실 속에 심각한 결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인생에 찾아 오는 모든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나, 형제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하고, 미원하는 것이 습관이되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중생케 해주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모든 복과 은혜를 주시고자 그 마음 안으로 비집고서라도 들어가실 수 있는 틈을 전혀 내드리지 않는 구제불능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도 이런 사람의 마음을 강제적으로 밀고 들어가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분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분을 초청하며 그 분의 구원과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만 들어가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나 힘이 없으셔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일 이런 식으로 일하시고 행하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노아 시대 사람들이나 소돔 성안에 살던 사람들의 마음 문을 박차고 밀고 들어가셔서 강제적으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주셨을거고, 그렇게 해서라도 노아시대 사람들이 홍수심판을 면할 수 있게 해주셨을 거고, 소돔 성도 보전되고 그 안에 살던 사람들도 다 하나님의 ‘침략’을 받고 본의 아니게 마음과 생각이 바뀌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을 원하지도 않고, 초청하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답답하고 불쌍한 나머지, 그것을 그대로 보고만 계실 수 없어서, 마치 소방관이 불난 집의 잠긴 문을 강제로 부수고 밀고 들어가듯이,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강제로 그 사람 마음 문을 박차서 밀고 안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하나님 마음대로 바꾸고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능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노아 시대 사람들의 마음 문을 강제로 밀어 열고 들어가서 새 의지를 갖게 해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그들과 모든 짐승이 홍수의 심판을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하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그건 그들의 자유의지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드신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의해 반응한 것뿐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여 홍수를 면하게 된 것이면,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실망을 하실 수 밖에 없게 되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는 용서받을 자격없던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홍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게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깊은 감동과 감격, 그리고 진정한 고마움과 기쁨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시며, 하나님은 꼭 있어야 할 중요한 뭔가가 빠져있는 것 같은 허전함과 싱거움 같은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받아야 할 만큼 추하고 악하고 부패한 인간들을 보시며 마음 아파하시며, 그들을 지은 것을 후회하시고 탄식하셨던 체험을 이번엔 그 반대 차원에서 느끼시게 될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인간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과 그것에 대한 값을 죽음으로 치루는 것에 대해서 그대로 두셨습니다. 다행이면서도, 큰 불행입니다. 다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 선택한 것을 존중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사람이 자유의지로 이기심과 욕심을 위한 것들을 선택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책임과 치룰 값은 죽음 밖에 없으니, 이러한 종말을 당해야 했던 노아 시대 사람들은 바로 이 경우였고, 하나님은 이들의 선택을 존중하여 역전시켜 주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그들에게 큰 불행이라는 겁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제대로 잘 이해하고 이것을 통해서 영원히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은 피하며, 영원히 하늘의 모든 보배를 누릴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을 선택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가 우리가 매순간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의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신 것과 자유의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고 의와 불의를 분간할 줄 아는 능력과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과 의를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악과 불의를 택할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행사할 수 있는가 하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경외하고 그 분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뜻과 명령을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까지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이 자유를 선한 목적을 위해 지혜롭게 행사하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결과를 맛보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만들어 내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교훈 중에 하나는,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을 따라 변하고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선과 의를 택하면 선하고 의로운 성품으로 변하고 성장해 갑니다. 그것의 마지막 열매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반면에 악과 불의를 선택하면, 악하고 의롭지 않은 성품으로 변해가며 날이 갈수록 더 악해지고 더 추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늘 고통스러운 삶이 따르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은 하나님의 진노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노아 시대 홍수의 교훈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어떤 길을 선택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떤 길을 선택하시렵니까?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사실 말입니다. 선택한 것이 여러분과 저를 만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만들어진 우리의 최후 모습과 성품을 보시고 그것에 맞는 생명으로 또는 사망으로 상 주십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8)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6-11)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