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31_창25(12-18)_약속하신 것은 지키시는 하나님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Oct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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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써, 구약 성도와 신약 성도 모두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요구하셨던 일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 뿐만 아니라 순종의 본이 되는 인물인 겁니다.
예수께서 이방인이었던 로마군대의 한 백부장에게서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칭하던 유대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믿음을 보시고 놀라시며 기뻐하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살아있는 믿음을 그의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서 보실 수 있었던 하나님께서도 놀람과 기쁨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창세기 22:12).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고, 또 그가 번제로 바치려던 아들 이삭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또 그들은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모든 그들의 힘을 당해낼 나라가 없는 무적의 백성이 되어 그들의 원수의 성을 차지하도록 해주실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창세기 22:16-18) 라고 약속하시고, 이를 위해 친히 맹세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는 일들은 모두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4:1).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아무도 부러워할 이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복을 그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런 복을 받기까지 아무런 잘못이나 흠이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을까요? 또 아브라함은 그런 복을 받았으니, 그 마음 속에는 아픔이나 슬픔이나 불행이 전혀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안타까워하고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이유가 되었던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아들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이미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마엘은 “사라의 여종인 이집트 사람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는 아브라함이 여든 다섯 그리고 사라가 일흔 다섯이 될 때까지 자녀가 생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라가 불임여성이었기 때문이엇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자기 여종으로 데리고 있던 이집트 사람 하갈을 남편에게 아내로 주면서, 그녀를 통해서라도 남편의 상속자를 얻으려고 했던 거였고,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에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가 상속자가 아니라,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바로 그 아들에게 복을 주실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라의 89이 된 몸에 아브라함의 씨를 받은 아이가 생겼고, 아브라함이 100 살 그리고 사라는 90 살이 되었을 때, 사라의 몸에서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둘 째 아들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첫 째 아들 이스마엘을 14 년 간 애지중지하며 키워왔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아들을, 사라는 자기가 낳은 아들 이삭이 젖을 떼는 큰 잔치 날에 이스마엘에게 놀림을 받는 것을 보고 격분하며, 아브라함더러 그 아이의 어미와 함께 집에서 쫓아 내라고 완강하게 요구한 겁니다. 아내가 정말 그럴 맘이 아니라, 너무도 화가 나서 심하게 말만 그렇게 한 것이겠거니 했던 아브라함은, 사라가 홧김으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정말 정한 마음으로 한 말임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창세기 21장 11절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아내의 요구를 따라 선뜻 하갈과 자기 아들인 이스마엘을 내쫒을 수 있는 상황도 마음도 아니었겠지요. 아무리 첩이 낳은 아들이지만, 엄연히 자기 피를 받은 아들을 그렇게 냉정하고 무정하게 집에서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태어난 후 무자했던 그가 그 아이를 얼마나 남달리 애지중지 키웠을텐데, 그러한 아비로써 그 피덩이를 내던지듯이 집 밖으로 내쫒으라니요? 그건 아브라함이 차라리 자신이 죽을지언정 아비로써 절대 하지 못할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심정을 쏟아내 보이며 애걸도 하고 설득도 해보았으나, 아내의 마음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한 아브라함은 그 순간 극에 달한 난처함과 마음의 괴로움으로 인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진하게 들지 않았겠을까요?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한 채, 깊은 마음의 고통 속에 빠져서 쓰러져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려 아브라함을 찾아 오신 것은, 아내의 마음과 생각을 바꿔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의 생각을 바꾸게 하셔서, 그가 아내의 소원과 말대로 따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더러 아내가 말한 대로 다 들어 주라고만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은 더 괴로워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신 대로 즉시 행동으로 옮겨서 순종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아브라함은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었다. 그는 먹거리와 마실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서, 그를 아이와 함께 내보냈다” (창세기 21:14).
아브라함이 바로 전날 밤 늦게까지 번민하고 괴로워하며, 아내가 요구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마음을 다음날 이른 아침에는 완전히 바꾸어서, 아내의 요구를 들어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서 마음의 불안을 떨쳐 버리고 안정과 소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이 그 어미와 함께 집을 나가도, 하나님이 그 아이와 엄마와 함께 해주실 것이고,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셔서, 무사할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은 한 민족을 이루는 조상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13).
이러한 약속을 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대로 이스마엘을 떠나지 않으시고 돌보아 주셨고, 이 아들은 장성한 후에 아내까지 얻는 복을 내려 주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주시는데, 창세기 21:14-21 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의 산물이 되어 태어난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또 자기에게 이용당한 그 아이의 어미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선택이 가져온 불행의 쓴 잔을 마시며 서럽고 외롭고 고생스러운 과정을 겪게 된 것에 대해, 이들 모자를 집 밖으로 내 보낸 후부터, 안타까움과 후회와 미안함이 뒤섞인 마음의 고통을 벗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서서히 위안과 평안을 회복하고, 드디어 이스마엘과 하갈로 인한 마음의 고통을 다 벗어 버리고, 지난 주 본문에서 말씀하신대로 더이상 바랄게 없는 만족스런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위해 약속하신 것들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또다시 우리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세고 깊게 못밖도록 돕고 있는 겁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은 집에서 나온 후부터, 아브라함이 그렇게 걱정하고 불안해 한 것과는 달리, 그들이 집에서 나온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늘 그들과 함께 계셨고 돌보아 주셨기 때문에, 이스마엘은 광야 생활을 잘 이기고 적응하며 자랐고, 유능한 무술가로 성장하였고, 드디어 나이가 찼을 때에는 그 어머니 중매로 외가 고향 땅의 처녀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와 함께 아들과 딸들을 낳았는데,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열둘을 낳았고, 또 이들은 모두 역시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열두 지파의 영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3-16절은 이스마엘의 아들 열두 명의 이름을 소개하고서, 이 열둘은 모두가 각각 자기 지파를 세우고, 그들의 지파의 통치자 또는 영도자들이 된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해주시겠다고 창세기 17장 20절에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반드시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어서, 그가 자식을 많이 낳게 하고, 그 자손이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에게서 열두 명의 영도자가 나오게 하고, 그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식언하시거나,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지 않는 분이 아니심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하갈에게 주신 약속을 말씀하신대로 지켜주신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함의 덕을 끊임없이 보는 사람들 아닙니까? 종종 우리는 오래 전에 기도하고 구했던 것을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후에 잊고 있었던 것들 중에서,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우리가 구했던 것을 주시기도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더더욱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은,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지키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 하에 여러분과 제가 한 가지 중요한 과제를 다시 마음에 새겨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약속하신 것은 지키시는 하나님의 덕만 보지 말고,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함과 성실함과 진실함을 우리도 닮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말로만 하려고 하지 말고, 말한대로 하는 사람이 됩시다.
약속한 것은 우리도 꼭 지키는 사람이 됩시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사실 본래부터는 말로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약속했던 것들도 사실은 정말 지키려고 약속한 것이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가 한 말과 약속한 것이 그만큼 행하고 지키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거지요. 그러니, 우리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 그리고 약속을 말하기 전, 신중한 고려와 진실된 결심을 하고 나서 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말과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말한대로 행해야 할 때 또 약속한 대로 지켜야 할 때, 많은 저항과 후회를 경험합니다만, 그래도 일단 말한 것과 약속한 것은, 아무리 귀찮고 하기 싫어도, 심지어 손해를 얻게 되더라도, 행하고 지키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점점 경솔한 말과 약속은 피하는 사람이 되고, 말을 하거나 약속을 할 때에는 늘 먼저 심사숙고한 후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약속에 신용을 얻어갈 때,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세상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저들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증언의 힘도 얻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첫 번 서신에서 호소하는 내용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바라기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서나, 서로 대화하는 일과 약속하는 일에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자는 겁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1서 3: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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