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3_창18(1-8)_나눔과 섬김의 조상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May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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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대낮에 그를 찾아 온 손님 셋을 후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이 식사를 다 마치고 난 다음에야 이 셋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를 찾아 오신 하나님과 천사들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들이 하나님과 천사들인 것을 모르고 대접한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마치 이들을 주님과 천사들을 모시는 것처럼 극진하게 환대하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든 자기에게 찾아 온 나그네는 늘 이처럼 환대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이렇게 환대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마 자신도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서 먼 이 이국 땅에 와서 지금까지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떠도는 외국인이며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러한 사람들의 심정과 필요가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집과 가족이 있는 고향을 떠나서 아무도 모르고 낮설은 땅에 와서, 괄시와 푸대접을 받아가며, 어렵고 위험한 일을 당하면 아무도 돕고 보호해주는 이 없이, 홀로 견디고 헤쳐나가야 하는 이민자와 나그네의 외롭고 서럽고 불안한 마음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압니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외국인과 나그네를 보면, 남다른 연민을 갖고 내 식구처럼 돕습니다.
아무도 도와주거나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늘 학대와 억압의 대상들이 되어왔습니다. 이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분노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여 판단하시거나,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0:17하-19).
이 말씀은 400년 간 이집트에서 외국인으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억압과 학대를 받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께서 건져내 주신 후에 이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실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될 때, 자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살던 때를 기억하고, 저들 가운데 몸붙여 사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에 대해 남다른 연민과 사랑을 베풀고 도와줄 것을 기대하셨던 것을 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자신의 이집트에서 살던 나그네와 노예의 삶을 잊고, 저들 가운데서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을 억압하거나 괴롭히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칼로 죽이겠다고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21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22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23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 24 나는 분노를 터뜨려서, 너희를 칼로 죽이겠다” (출애굽기 22:21-24a).
여러분, 혹시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실 때, 그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와 종살이를 400 년 동안 하면서 괴로움을 받을 거라고 하신 것에 대해 의아스럽게 생각하시지는 않았나요? 복을 주실 대상과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될 대상으로 택하시고 부르신 아브라함의 후손이 어째서 남의 나라에서 괴롭고 힘든 나그네살이와 종살이를 하도록 계획하신걸까요? 그것도 400 년이라는 긴 시간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주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경고하신 말씀 속에서 그 힌트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가나안 땅에서 살 때에, 이들에게 몸붙여 살게 될 나그네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훈련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0:19).
사실 이 세상은 힘센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며 이용해 먹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이 세상의 이런 악은 계속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이런 악과 그로 인한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요한계시록 21:4)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억압당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의 대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가혹하리만치 오랜 세월 여러가지 어려움과 괴로움을 당하는 훈련을 허락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고통 중에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가 불러 온 징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징계이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훈련이든, 어떤 고통이든지, 하나님은 우리가 체험한 아픔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위에서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위로해줄 수 있는 동기와 힘이 되게 하십니다.
사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이 세상과 땅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필요한 것은 부족함과 불편함 없이 마음껏 먹고 마시고 갖추고 쓰도록 허용하셨고, 그 어느 것 하나도 값을 요구하지 않고, 다 무료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그네” 를 대하시는 마음과 모습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삽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들은 다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쓰라고 주시고 허용하신 것인데도 말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허용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없거나 모자라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자신이 필요한 분량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데도, 그것이 필요한 이웃들과 나누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를 더 쌓기 위해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것들을 착취합니다. 날이 갈 수록, 빈부 차이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분이 이 땅을 직접 다스리시려고 계획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더이상 빈부의 차이와 차별이 없이, 모두가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누리고 즐기는 세상을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믿는 이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지금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지역 교회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보내는 일에 동참하도록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던 겁니다.
“13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14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5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8: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주셔서 큰 부자가 되게 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웃과 나누고 그들을 도울 때, 풍부하고 후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오늘 본문에서 자기를 찾아 온 나그네 세 사람에게 차고 넘치도록 풍부한 분량과 지극한 정성을 다 쏟아서 환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웃이 아닌, 전혀 모르는 나그네 세 사람에게까지 극진하고 후하게 환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만큼 내어 주고 베풀 수 있는 풍요로움이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찾아 온 이 나그네들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환대해주는 아브라함의 마음 저변에는 자신도 멀리 있는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와서 살고 있는 나그네로써, 이들을 위한 동병상련의 연민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요로울 때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성도의 구제에 동참할 것을 권할 때 저들에게 들려 주었던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구제가 그 좋은 예가 됩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사실 큰 환난 속에 빠졌었고, 극심한 가난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바울은 계속 증언하기를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2, 3) 라고 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큰 어려움과 가난을 겪으면서 보니까, 같은 어려움에 빠져 있는 형제 교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동병상련의 연민을 갖고, 없는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다 털어 내주었던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시련과 고통을 맛보는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게 아닐까요? 때로는 우리 수중에 넉넉함도 허락하셔서, 그것을 나누게도 하시지만, 때로는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 수 있도록,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그 어려움을 우리도 당하여 그 아픔과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시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맛볼 수 있게 하신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돌아서서 우리처럼 환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위로하라고, 우리를 환난 속에 있게 하시고, 환난 속에 있는 우리를 온갖 위로로 찾아 와 주시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4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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