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8_종려주일_마태21(1-11)_알아보지 못한 메시야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Mar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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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Mar 29, 202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토요일) 다음 날(일요일 또는 주일)이었습니다(요한복음 12:1, 12). 입성하실 때 제자들과 군중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요한복음 12:13) 나왔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이 날을 가리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예수께서 이 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계획은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게 될 날이 가까이 온 것을 아신 후부터 결심하시고 세우신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누가복음 9:51-52a). 이 후부터 예수님은 여러 날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시기까지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누가복음 13:2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까지 오셔서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1절) 라고 하는 마을에서 잠시 쉬시며, 제자 두 명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어, 그 분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실 때 타실 짐승을 준비해 오도록 명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짐승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인 마태는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계획을 하신 이유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고(4절) 설명하면서, 그 예언자가 한 말을 스가랴서 9장 9절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5절).
스가랴서 9장 9절은 주전 520년 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70년의 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본국 땅으로 돌아온 후에도, 예전과 같이 부강한 나라로 회복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실망과 낙심 속에 빠져 있을 때,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전에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손 중에서 한 왕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다시 회복하게 해주시겠다고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으로 다시 소망을 붙들고, 힘을 냈습니다. 언젠가는 저들을 모든 원수로부터 구원하고,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다시 회복할 메시야(왕)가 올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스가랴서 9장 9절 전체를 다 받아들이지 않고, 부분적으로 저들의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인데 있었던 거였습니다. 9절의 마지막 부분은 무시하고 기억하지도 않았고, 첫 부분만 믿고 받아들였던 겁니다.
오늘 본문의 5절은 마태가 스가랴 9장 9절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고, 간력하게 요약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전체를 그대로 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다.
그는 온순[겸손]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가 일부러 이 구절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앞부분만 다시 보시면, 이스라엘을 위해 오실 메시야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다."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이 필요했던 왕이요 바랬던 메시야 상과 딱 들어맞았습니다. 그 당시 저들을 괴롭히는 외국의 원수들을 무찌르고, 사회의 모든 악인들을 처벌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갚아 주고, 악인들의 행패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해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 줄 왕을 바라던 이들의 기대와 이 말씀은 딱 들어 맞았던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잘라내고 기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순[겸손]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 말씀이 묘사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첫부분 내용과 완전히 다르고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용인즉, 저들을 위해 오실 메시야가 군마를 탄 늠름하고 용맹스런 모습으로 오시는 게 아니고, 온순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거라 하고 있으니, 이런 모습의 메시야가 이들의 마음에 들리가 없었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 예언의 말씀 마지막 부분은, 깎아서 버린 과일 껍질처럼 버려져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 속에 담겨져 있지 않은 부분이 되어 버렸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모습대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시는데도, 당시 예루살렘 도성 안의 종교 지도자들마져도, 저들 눈 앞에 계신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참 메시야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저들이 원하고 기대한 메시야는 저렇게 힘없게 생기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그가 올라타고 있는 어린 나귀는 그의 몸무게를 힘겨워하며 비틀거리며 입성하는 저런 모습의 메시야는 아니었던 겁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이미 오래전에 내 던지고, 그 첫 부분만 붙들고 있던 저들의 눈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가 저들의 메시야로 보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성하시던 모습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왕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라 할 수 있지만, 이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항상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생각되더라도,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비추어 그 가부를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서 55:8-9).
여하튼, 예수님은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써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모습으로요. 눈이 있어도 볼 눈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메시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볼 눈이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메시야로 보였고, 이를 깨달은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실 때 외칠 시편 말씀들을 큰 소리로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9절)
이 말씀들은 두 개의 시편(118:25-26; 148:1)과 이사야 62:11에서 각각 따서서 구성한 겁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예수께서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한 일들입니다. 귀가 있어도 막혀있고, 눈이 있어도 감겨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 주민을 이루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즉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갈릴리부터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비록 하급계층들이었어도,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것을 입증해준겁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본문 마지막 두 구절은 영적 귀가 먹고 영적 눈이 감겨 있던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 날 저들의 성 안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 (10-11절).
참으로 안타깝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저들의 눈 앞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저들의 메시야가 입성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저들의 귀에 들려오는 메시야를 환영하는 무리들의 찬송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들을 구원하실 분을 알아 보지 못하고, ‘이 사람이 누구냐?’고 서로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 물으면서 저들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이 누구이며, 어느 지방 출신인지를 알아 냅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예언자였습니다. 왜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이라고 멸시했습니다(요한복음 1:46). 예나 지금이나, 배경과 출신을 따지며, 사람을 평가하는 걸 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이 제일 고대했던 저들의 메시야의 고향이 저들이 제일 멸시하던 마을이었다는 것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일은 정말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 드러난 저들의 메시야는 저들이 바라고 기대한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가 나신 마을도 저들이 상상했던 곳과는 너무도 반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생활이란, 나의 모든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태복음 16:24)고 하신 겁니다.
이 말씀 중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라는 말씀은 자기 생각과 성향과 선호하는 것, 그리고 자기 경험과 이해와 지식 등을 완전히 내려 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전히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놓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주님이 위에서 하신 말씀은 사실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으신 후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20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하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선뜻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그 사실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계시하여 알려 주셨을 때, 그것을 믿고 고백했던 거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계시를 받고 믿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믿고 확신 속에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고백한 것을 들으신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에게 또 한 가지 새로운 계시를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을 보면,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고 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내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메시야)로 오신 그분의 아들이 어떤 일을 당하도록 계획하셨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 내용은 제자들이 상상하지 못한 내용이었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또 먼저 나섰습니다. 메시야에게 그런 일을 계획하신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자신은 그 일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노라며 강하게 거부하고 반대한 겁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베드로의 혈기를 압도하고도 남을 무서운 책망이었습니다. 우선 주님은, 베드로의 생각을 조절하고 있던 사탄을 꾸짖으시고 쫒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해주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3절 하).
베드로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착각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단 속에 암시되어 있는 진리는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며,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우선 순위가 뒤바꿔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그들의 폐단을 바로 잡아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처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24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방식을 고집하는 부분은 없으신가요? 그러다가 바로 눈 앞에 계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종종 놓치지는 않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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