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8_창15(1-6)_위기 속에서 다시 회복한 아브람의 믿음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Feb 28, 2021
- 10 min read
오늘 본문은 믿음의 위기를 맞은 아브람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고민하고 있던 일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때를 놓쳐서,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따라 오던 아브람은 하나님이 정말 약속하신 것을 지켜주실까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그의 나이가 75살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아내의 불임으로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새 땅과 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룰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 땅에까지 왔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65살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노부부를 임신하게 해주시면, 자식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더군다나 가라고 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니까, 이제 오늘 내일이면 곧 아기가 생길 것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기 소식은 없고, 세월만 자꾸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조카 롯과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은 땅에서 양 쪽 집짐승을 함께 치고 먹이기에는 각자가 거느린 짐승 수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게 해서 떠나 보냈습니다. 롯은 결코 정이 붙고 사랑스러웠던 조카는 아니었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잃었던 롯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던 큰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제일 기름진 땅을 택해서 훌쩍 떠나가는 롯의 뒷 모습은 아브람에게 적지 않은 실망과 허탈감을 갖게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다시 찾아 오셔서 위로해주시며, 처음에 약속하셨던 것에 대해 좀더 실감있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14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15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16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창세기 13:14-17).
좀 더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람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겁니다. 특히 16절의 말씀은 누그러들던 그의 믿음에 큰 격려와 확신을 갖게 해주었을 겁니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약속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게 된 아브람의 마음을 새롭고 더 굳센 믿음으로 채워졌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새 지역으로 장막을 옮겼고, 거기서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창세기 13:18)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식은 여전히 생기지 않고,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소돔에 살고 있던 조카가 그돌라오멜의 막강한 연합군에 의해 붙들려 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의 혈육이 노예로 붙들려가고 있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아브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병 318 명을 이끌고 조카를 구출하기 위해 포로들을 끌고 자기네 영토로 돌아가고 있는 그돌라오멜 연합군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연합군을 무찌르고 조카와 모든 소돔 사람과 재물들을 다 되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막강한 연합군을 318 명의 집에서 훈련시킨 병사들로 싸운다는 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았다면 아브람은 자기 사병들과 함께 전사했을 겁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고 가나안 땅까지 따라온 것은, 자기 몸에서 날 상속자를 약속하신 것 때문이었는데, 조카를 구출하려고 그돌라오멜 연합군과 싸웠던 일은, 상속자를 얻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패배를 당했던 그돌라오멜이 복수를 위해 다시 군사력을 보강하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이번에도 아브람을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를 저주하는 (우습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창세기 12:3).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람도 이 순간 만은 현실적인 생각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종종 경험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게 하는 현실의 가리개로 덮혀버리지 않습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우리 남편과 우리 아들은, 내가 10년 이상 기도해 왔건만, 눈꼽만큼도 예수님을 믿어보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모습인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건만, 그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기세가 아직까지 조금도 보이질 않고, 오히려 더 완고한 모습이니, 아무래도 우리 남편과 우리 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려나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람에게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지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75살의 노인이 그런 약속을 받고 들뜬 마음으로 믿고 기다려 왔는데, 아직까지 소식은 없고, 아브람은 어느 덧 85살이 되었고, 사라는 75살이 된 겁니다. 이 정도 나이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현실이 더 신빙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브람에게 믿음의 위기가 찾아 온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닌 겁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거라는 생각을 이미 단념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오면서, 그 분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지키시는 분인 줄로 믿었는데, 하나님도 때로는 현실을 벗어 나실 수 없는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자식을 가질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을 이미 상실한 두 노인의 몸으로는 하나님도 자식을 갖게 하실 수 없으신가 보다 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게도 하실 수 있는 것들 중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하나님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 아브람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과 꾀로 자신을 보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꾀로 당해 낼 수 없는 대상을 만나면, 자신의 생명을 포함하여 모든 귀한 것들을 그에게 빼앗길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게 될 때, 아무도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자가 없을 겁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람이 바로 이러한 두려움에 빠져 있었고, 그 이유는 자신이 믿었던 하나님이 더이상 믿지 못할 대상이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 빠져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으로 찾아 왔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어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게 아니라,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오신 거면, 하나님이 오신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어 문장은 특별히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약해진 사람의 믿음이 다시 확신을 얻게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외에는 없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불신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낙심되었던 마음이 위로와 격려를 얻고 소망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다시 들을 때, 누그러졌던 믿음이 다시 힘을 얻고 확신을 얻게 됩니다. 본문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도 믿음의 시작 단계와 또 그 여정 속에서 확신을 잃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위기를 맞이했던 때도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 한 예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믿음에 힘을 얻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그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아브람을 찾아 온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들어 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1절). 사실 이 구절 마지막 부분도 원어에서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매우 큰 보상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을 해주겠다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하나님이 ... 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과 함께 하시는 한, 아브람은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의심과 두려움 속에 깊이 빠져 있던 아브람에게는 이 말씀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말씀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매우 큰 보상 또는 상급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에 대해 아브람은 지금까지 참고 있던 말을 쏟아내며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녀석(아이)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 15:2-3).
아브람의 이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진심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솔직하게 하나님에게 자신의 세운 계획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말씀드리면 혹시라도 하나님이 미안해서라도 아브람에게 자식을 갖게 해주시겠지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아브람은 이미 하나님께서도 현실을 거스르는 일은 무리스럽게 하시지도 않고, 또 그렇게 하실 수도 없는 분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아브람의 말은 항의이면서도 선언이기도 한 겁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생각이 이렇게까지 바뀌어 있는 자신의 종을 꾸짖거나 책망하시질 않는 것을 봅니다. 아마도 아브람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그의 믿음이 아직은 미숙하고, 무지한 가운데서 갖게 된 생각인 것을 이해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인내와 자비를 보여주시며, 아브람의 잘못된 결론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창세기 15:4).
아브람은 이 말씀과 약속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듯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실망과 낙심이 너무 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설득하는 것이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말씀을 한 두번 읽고 마음에 감동이 오지 않는다고 덮어 두거나 귀를 막으면 안되는 거지요. 그와는 달리,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할 때, 우리의 굳어진 마음과 생각이 조금씩 풀리고 열리면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얻게 됩니다. 얼마 전에 많이 와서 지붕과 땅에 두껍게 쌓인채로 꽁꽁 얼어붙어 있던 눈이, 한 참동안 그렇게 얼어 있을 것 같았는데, 요즘 푸근한 날씨가 계속 되다 보니까 벌써 거의 다 녹아 없어진 처럼 말입니다.
여하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것을 시큰둥하게 여겼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람을 책망하시지 않고, 인내와 자비로 대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브람을 장막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밤하늘에 펼쳐 있는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아브람의 믿음이 다시 소성케 하는 확신을 갖게 해주십니다.
“하늘을 쳐다 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창세기 15:5). 이 말씀을 하신 후, 하나님은 잠시 침묵하시며 기다리셨습니다. 물론 아브람에게 별들을 셀 때까지 기다리시려는 것이 아니었겠지요. 아브람이 그 수많은 별들을 셀 수 없다는 것은 아브람도 알고 있는 일이고, 하나님도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다음 말씀을 하시기 전에 무엇을 위해 잠시 침묵하시며 기다리신 걸까요? 그리고 왜 밤 하늘을 쳐다 보라고 하시고, 셀 수 없는 별들의 수를 세어 보라고 하신 걸까요?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약속을 더이상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아브람의 생각에 다시 확신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하시는 겁니다. 현실 앞에서는 하나님도 그 약속을 못지키시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아브람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려고 하시는 겁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 분의 성실성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85세의 자신과 75세의 아내의 몸을 통해 자식을 낳게 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여전히 자식을 낳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진정성과 능력을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이러한 아브람이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말씀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던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고, 그 모든 것을 말씀의 능력으로 하시는 분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태초에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밤하늘의 별들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 창공 즉 우주 공간을 채운 해와 달과 별들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우선 아무 것도 없던 것에서 우주의 무한한 공간을 만드시고,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그 무한한 우주 공간에 수를 셀 수 없는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그 어떤 재료도 없이 오로지 말씀 한 마디로 만드시되, 눈깜짝할 한 순간에 만드셨습니다.
“1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가르고,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15 또 하늘 창공에 있는 빛나는 것들은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창세기 1:14-15).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늘을 쳐다 보고, 별들을 세어보라고 하시고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아브람에게 관찰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시며 침묵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이에 몇 마디 더한 하나님의 계시를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이사야서 40:26).
아브람은 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별들을 올려다 보며, 그것들을 한 순간에 한 마디 말씀으로 만들어 놓으셨던 하나님은 그 말씀의 능력으로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여호와의 능력과 신실하심은 의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따라서 그분의 말씀과 약속도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겁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장소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와 그 만물을 보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신성을 충분히 깨닫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창조물의 증거에 힘입고 하나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창세기 15:5).
아브람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더이상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무한한 우주 공간에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한 순간의 한 마디 말씀으로 만드신 하나님에게, 90을 바라보는 자신의 노쇠한 몸과 월경마저 멈추어졌고 이제 80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의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으신 일임은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확신 속에 아브람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믿을 수 있었던 겁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실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체의 말없는 증언은 소리나는 말보다 더 분명하고 설득력있는 증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6). 바울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이신득의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바울은 그 서신들 속에서 강조하는데, 이 교리의 근원이 바로 오늘 본문 6절입니다.
아브람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설득을 받고, 그분께서는 약속을 지키실 분이고,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실 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자기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거라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은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에 대해 바르게 알고 믿는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또는 바른 일이라고 인정해 주신 겁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 누구도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이나 믿음, 그리고 이런 생각과 믿음을 따른 행위로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로마서 3:10-11).
혹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담겨져 있는 율법을 받아도, 이 율법을 따라 완벽하게 행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오로지 자신의]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로마서 3:20). 율법을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도 그 율법을 완벽하게 행하여 의롭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며 가르쳤던 모세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결국은 약속의 땅에 발 한자국도 들여 놓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이미 진단하신 것처럼,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과 지혜와 행위로는 절대로 의롭다는 인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죄사함을 받지도 못하고, 구원도 영생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6절은 이러한 딜레마에 놓여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아브람의 경우는 하나님이 본문 1절부터 5절에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내용을 믿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 오늘은 우리가 무슨 말씀과 약속을 믿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 거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정리해 준 것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 .
“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 . .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