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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4_창14(1-16)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 Writer: 전재균목사 (Pastor Chun)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Jan 24, 2021
  • 7 min read

가족 중에도 나와 늘 마찰을 일으키는 식구가 있습니다. 성격과 생각이 많이 다르다보니 그렇습니다. 특히 믿음을 아직 갖지 않은 식구가 내 믿음에 대해서 싫은 소리를 하거나 비판적일 때 느끼는 괴로움은 더 깊습니다. 때로는 같은 믿음을 갖고 있어도, 영적 성숙도가 달라서 의견과 사고방식의 차이로 인해 마찰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아브람에게도 이러한 고민과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조카 롯 때문이었습니다. 롯은 그 아비를 일찍 잃은 후, 할아버지 데라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큰 아버지인 아브람을 의지하고 따랐습니다. 특히 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은 조카를 자기 아들처럼 여기고 사랑하며, 정성껏 보살펴 주었을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버지 집안 식구들을 다 두고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하셨건만, 조카만은 떨처 버리지 못하고, 가나안 땅까지 데리고 갔던 거라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아브람은 조카 롯을 아버지가 아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듯 대하고 사랑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겁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롯에 대한 긍정적인 말이나 칭찬을 찾아 볼 수 없고, 부정적인 면만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예를 창세기 1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비록 먼 타국 땅에 와서 살고 있었지만,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13:2)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를 복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큰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두 가정은 더이상 같은 장소에 머물 수 없을 정도로, 각자가 갖고 있던 재산이 너무 많았다고 하니, 롯도 상당한 부자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사실 롯이 이토록 많은 재산을 소유한 큰 부자가 된 것은 큰아버지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도 찾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두 집안의 집짐승이 너무 많아지다보니, 이것들을 같은 땅에서 꼴을 먹이면서 먹이가 부족해지다보니, 양집안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잦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먼저 그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이 큰아버지인 아브람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롯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볼 수 있는겁니다. 짐승을 먹일 꼴이 부족하기 때문에, 큰아버지의 목자들과 자신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잦아지고 있는 것은 롯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롯은 목자들이 다투는 일을 말리거나, 이것을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해 나서려고 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만일 롯이 된사람이었으면, 자신의 은인인 큰아버지의 목자들에게 양보하질 못하고 대들고 싸우는 자신의 목자들을 타이르면서, 먼저 양보하라고 훈계한 후, 큰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신의 목자들을 대신하여 사죄드렸을 겁니다. 그리고 좋은 꼴이 있는 지역을 큰아버지께 양보해드리고, 자신이 먼저 목자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났을겁니다.


안타깝게도, 롯은 큰아버지가 먼저 찾아와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안할 때까지 자신의 목자들이 아브람의 목자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방치해 두고만 있었으니, 그 됨됨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롯의 방자함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큰아버지가 해결책을 제안하였을 때도, 자신의 욕심부터 먼저 챙기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큰아버지와 헤어집니다.


아브람은 조카를 설득합니다. “우리는 한 핏줄이니,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땅은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먼저 좋은 곳을 택해서 떠나거라.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을 택하겠고,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나는 왼쪽을 택하여 가겠다.” 만일 롯이 된사람이었다면, 자신을 지금까지 자식처럼 사랑하고 보살펴주신 큰아버지께 좋은 땅과 지역을 먼저 택하시라고 우선권을 드리고, 그 후에 자신은 그 반대편 쪽을 택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가 먼저 제일 좋은 땅을 택해서 떠납니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 . 롯은 요단의 온 들판을 가지기로 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13:10, 11). 이렇게 롯은, 이기적이고 고마움을 모르며, 어른을 공경할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응석둥이 인채로 성인이 된, 한심스럽고 장래가 걱정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보면, 괴씸하여 더이상 챙겨주고 보살펴주기는 커녕, 아예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이 뚝 떨어지는 조카였던 겁니다.


그 후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13:12하) 고 합니다. 아마 더 좋은 땅, 그리고 더 큰 땅을 찾아 계속 자리를 옮겨갔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소돔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만큼은 감지하면서 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13:13)는 것을 그 주위에 살던 사람들은 다 알고 걸렸을 테니까요. 그런데 롯은 소돔을 피하려고 하기는 커녕, 서슴없이 소돔이 있는 곳으로 더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까운 근처에다 자리를 잡고 한동안 지냈던 겁니다.


물론 롯은 의인이었습니다(베드로후서 2:7-8). 그가 소돔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해서 소돔 사람들을 모방하여 악하게 살았다거나 그들의 죄악에 동참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롯이 소돔 사람들이 악평이 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성 가까이까지 가게 된 이유는 그 지역 들판이 자신의 집짐승들을 위한 좋은 꼴을 얻을 수 있는 기름진 땅이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롯은 많은 돈을 모은 후에, 목축업을 청산하고, 아예 소돔 성 안으로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14:12). 아마도 큰 부자가 되었으니, 많은 짐승 떼를 몰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고생스럽게 돈벌이하는 것보다, 안전한 성 안에 크고 좋은 집을 장만하고 거기서 가족들과 편하고 즐겁게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내린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돈을 많이 벌 수만 있고, 일평생 편하고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과 거래하고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이웃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그 길을 택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창세기 19장에 가서 확인하게 되겠지만, 롯의 이와 같은 현명하지 못하고 영적이지 못한 선택은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아내의 영혼을 포함하여 일평생 고생하며 번 돈으로 장만한 모든 부를 하루 아침에 다 잃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여하튼, 롯이 이런 사람이었으니, 이러한 조카를 아브람과 사라가 지금까지 데리고 살아오면서 속으로 참고 견뎌야했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깊었겠을까 상상해 봅니다. 끝까지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기 이익만 챙겨서 떠나는 조카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브람과 사라의 마음 속으로 정말 꾀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 롯이 떠나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에 아브람에게 깜짝 놀랄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먼 시날 땅에서부터 4 왕들이 동맹한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소돔과 동맹한 5 왕들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소돔의 모든 재산과 먹거리과 사람들을 다 빼앗아갔는데, 그 중에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는 겁니다.


자기 조카와 소돔 사람들을 사로잡아간 동방 연합군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어서,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소돔 땅에 이르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여러 종족들을 쳐서 이기면서 내려왔는데, 그 중에는 당시의 거인족들이었던 르바 사람, 수스 사람, 엠 사람들도 있었다니, 이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만한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조카가 이 연합군에 의해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 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이 훈련시켜 놓았던 군인들 318 명을 데리고 쫓아가서, 동방 연합군을 쳐부수고, 그들을 가나안 땅 밖으로 완전히 쫒아낸 뒤에 조카 롯를 비롯해서 모든 소돔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다시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점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당시 그 어떤 종족과 그 어떤 동맹군들도 당해내지 못했던 막강한 동방연합군을, 어떻게 아브람이 318명 밖에 안되는 작은 병력으로 쫓아가서 싸워 이기고, 가나안지역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단 말일까요?


사실 이 사건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명해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뭐라고 약속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은 아브람이 강하고 큰 민족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을 당할 민족이 없을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의 동방연합군을 이긴 사건이 바로 이 말씀을 확증해주는 사건인 겁니다. 또 약속하신 것 중에는 아브람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돌라오멜은 아브람의 조카인 롯을 사로잡아감으로써 아브람을 똑같이 대한 거였습니다. 롯을 사로잡아서 종으로 부리려고 한 것과 롯의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간 것은, 롯의 혈육인 아브람에게 똑같이 행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돌라오멜은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했던 것이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시고 행하신 겁니다.


한 가지 더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아브람이 자기 조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가서 그를 구출해 오는 모습과 우리 주님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신가요?


아브람은 정이 붙질 않는 조카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겁니다. 꾀심하고 배은망덕한 조카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도운 겁니다. 사실 인간적인 계산으로만 가늠한다면, 롯은 아브람의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구출해 줄 만한 가치와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조카를 구출하기 위해서 자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힘과 자원을 다 동원하여 조카를 사로잡아가고 있던 원수들과 결사적으로 싸워서 이긴 후 조카를 다시 찾아 돌아왔습니다.


이런 아브람의 모습은 먼 훗 날, 모든 민족이 구원의 복을 받게 해 줄 아브람의 후손(“씨”)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type)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실 모습을 아브람의 행위에서 보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기가 불가능한 대상을 사랑하는 거죠. 보살펴줄만한 가치와 자격이 없는 대상을 보살펴주는 거죠. 도와줄 만한 가치와 자격이 없는 자를 도와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좀 더 실제적 시각을 갖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도 사랑할만 하니까 사랑하셨겠지 하면,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를 읽고 묵상해 오면서 정말 놀라워해야 할 사실 중에 하나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입니다. 홍수를 불러오고야 만 타락한 인간성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창 6:5)이다 하셨습니다. 그럼 홍수를 겪고 난 인간은 정신을 차렸나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홍수를 겪고 나서도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창 8:21)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사람의 중심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썪은 것”(예레미야서 17:9)이다 하셨습니다. 사람은 과연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실만 했던 대상입니까?


다음은 듣기가 몹씨 불편하시겠지만,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중심과 실제에 바울을 통해서 진단하신 내용입니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로마서 3:12-14). 주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복음 15:19-20)고 하셨습니다. 과연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실 수 있는 모습이겠습니까?


바울은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허물과 죄 속에서 살았다고 하질 않고, 아예 허물과 죄 속에서 ‘죽었던 사람들’(에베소서 2:1)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었다면 그래도 썩는 냄새는 안났겠고, 보기도 흉하지는 않았을텐데라고 할만하겠지만,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하니, 죽은 사람은 시체라는 말이고, 시체는 흉한 모습과 악취를 내는 것 아닙니까? 과연 이러했던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실 만한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사랑스러워서가 아니었던 건 분명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오로지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한 사랑이었던 거지요. 그리고 더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악과 흉한 것들을 완전히 씯겨내주시고, 새롭고 깨끗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사랑하셨던 거지요. 좀더 간단하게 말하면, 사랑스러운 면이 전혀 없던 우리를 사랑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지도록 사랑해주신 겁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러 자기 집에서 훈련시켜 놓았던 병사 318명을 데리고 갔다고 하신 말씀 속에서, “데리고” 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다 쏟다’ 또는 ‘완전히 비우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괴씸하고, 배은망덕하며 정떨어져서 다시는 보살펴주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았을 조카를, 아브람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구출하기 위해서 달려갔는데, 자기가 갖고 있던 병사 중에 한 명도 남기거나 아까워하지 않고 다 출동시켜서 쫓아갔다는 겁니다. 이게 병사의 숫자 뿐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이라면, 아브람은 사실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해서 다 쏟아 부은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누구를 위해서요? 그 사랑스럽지 못한 조카의 생명을 구하려고요!


여기서 또다시 아브람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습이 겹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로마서 8:32). 우리 주님도, 천부의 뜻을 받드시고, 똑같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제물로 드리셨습니다(마가복음 10:45).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분이 되셨더랬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부요하게 하시려구요 (고린도후서 8:9). 그리고 여러분과 저를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새롭게 창조된 새 인간으로 만들어주시려구요.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신을 닮은 아브람의 조카를 위한 사랑을 기뻐하시고, 마침내 롯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가운데서 구출해주십니다. 몇 주 후에 보겠지만, 아브람은 끈질긴 중보기도로 하나님이 롯을 살려주시게 합니다. 그러나 그 중보기도의 힘은 사랑스럽지 못한 조카를 사랑하여 목숨을 걸고 쫓아가서 구출해 온 아브람의 하나님을 닮은 사랑의 뿌리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에게도 ‘롯’들이 있는데,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곧 떨어질텐데, 우리는 언제까지 마음에 우리의 ‘롯’들을 향한 미움과 분노의 응어리를 끌어안고만 있을러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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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ds031059
Jan 30, 2021

아멘! 아멘! 너무 귀하고 소중하고 필요한 말씀 꼭 오늘 제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창세기를 실제 상황으로 풀어 주시고 현 상황에 적용해 볼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들과의 관계,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긍휼히 여기지 못한것들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것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세기를 배우고 들음으로써 성경을 읽을때 전보다 하나님 마음을 조금은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하루에 7시간 정도 읽고 있습니다. 저희들을 위한 신실하신 목사님의 철저한 말씀 준비와 선포가 있었기에 오늘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콧마루가 시큰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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