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8_창12(8-9) 산간지방에 친 장막 그리고 네겝까지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Nov 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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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님께 바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9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본문은 아브람이 어디에 장막을 쳤는지 보여줍니다. 장막을 쳤다는 것은 그 곳에 어느 기간 동안 머물면서 생활하기 위해 터를 잡았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살 곳을 마련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과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아브람은 그가 가족과 살 거주 형태를 어떤 것으로 삼았고, 또 그것을 어느 장소에 정했는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표현한다면, 아브람은 그 가족과 살 곳을 아파트로 정했는지, 아니면 개인 주택을 구입했는지, 그리고 어느 지역 또는 어떤 동네를 정했는지를 관찰하자는 겁니다.
아브람 시대 때에도 영주할 목적을 위해 돌이나 흙으로 지은 집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집들은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나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옮겨 다녀야 하는 유목민들은 집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키우는 가축과 짐승을 위해 먹이를 따라 옮겨 다녀야하기 때문에 이들은 쉽게 치고 거둘 수 있는 장막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람은 바로 이러한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면서 거처를 옮겼고, 그 때마다 장막을 쳤다 거뒀다 하는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정말 힘들고 고달픈 삶이었던 겁니다.
만일 아브람이 이런 고생스런 삶을 청산하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집짐승 외에도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짐승을 다 팔아서 없애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편리한 도시 안에 크고 좋은 집을 장만하여 가족과 편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평생 유목민의 삶을 고집했습니다. 그 아들 이삭도 그랬습니다. 3대 후손 야곱도 유목민의 삶을 이어갔구요. 이들은 고달프고 고생스러운 유목민의 삶을 버리고 도시로 들어가고 편한 삶을 살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유목민 생활을 계속하며 도시 안에서의 편리한 삶을 멀리했던 걸까요?
이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는 6절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람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에 이르렀는데, 성경은 그곳을 가리켜 ‘가나안 땅’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그 곳의 주민이 가나안 사람들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6절 마지막 부분에 말하기를 아브람이 그 곳에 들어 서고 보니,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그냥 흘러 보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6절에 쓰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이라고 하는 이름은 우리가 이미 들은 이름입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아난 사람은 이 가나안의 후예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조상이었던 가나안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는 그 할아버지의 저주를 받은 대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아버지 함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 벗고 누워 있던 것을 가나안의 아버지인 함이 들어가서 그 모습을 훔쳐 본 후에, 나와서 그의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알렸습니다. 아버지의 생식기에 대해서 바깥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묘사하며 놀리는 일을 자식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거죠! 자식으로써 못할 악을 범함으로써 함은 아버지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그 아버지로 하여금 자기 아들인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리게 하고 만겁니다.
이래서 가나안은 졸지에 할아버지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저주 내용 중에는 가나안이 “가장 천한 종이” 될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 바닥층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 바닥층에서도 가장 바닥층이 되라는 저주를 받은 겁니다. 이것은 그들의 삶이 어떤 문화를 형성할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그 어떤 종족보다도 하나님과 먼 생활과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갈 사람들이 될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양 떼와 소 떼가 너무 불어나서 더이상 좁은 땅에서 같이 지낼 수 없어서 따로 떨어져서 살기로 했을 때, 롯이 택해서 갔던 땅이 소돔이 있는 방향이었다고 했습니다 (창 13:12). 그리고 얼마 안되어 아예 소돔이라고 하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거주하지요. 그러나 창 13:13은 소돔 사람들이 “악하였으며,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 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소돔이라고 하는 도시를 이루고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가나안의 후예들이었던 겁니다.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을 낳고, 그 아래로, 헷과 여부스와 아모리와 기르가스와 히위와 알가와 신과 아르왓과 스말과 하맛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 족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랄을 지나서, 멀리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에까지 이르렀다.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함의 자손이다” (창 10:15-20).
소돔 사람들의 악과 죄는 모든 가나안 족의 문화와 생활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악과 죄의 구체적인 형태는 창세기 19장을 다룰 때 함께 살펴 볼 것입니다. 다만,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뎌 놓았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와 행실이 얼마만큼 하나님의 눈에 가시가 되고 있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서부터는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양식과 행실에 물들지 않으려는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친숙해질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피하였던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베델과 아이라고 하는 도성 안으로 들어 가서 거하려하지 않고, 이 두 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산간지방을 택하여 그 곳에다 장막을 친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을 길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8절 상). 아마 여기까지 말했어도 충분하였을 텐데 창세기 저자는 여러 말로 아브람이 정확하게 어디에도 장막을 쳤는지 더 자세하게 보충하는 걸 봅니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8절 하).
이것은 우리에게 이 사실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서 악과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성들을 피하여 그들의 영향력이 제일 적은 장소인 외딴 산간지방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우리 믿음의 본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겁니다. 외롭고, 위험한 곳이라도 하나님과 더 가깝게 동행하고 따르기 위해서는 서슴치 않고 선택하고 있는 아브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조상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짐승의 먹이가 있는 곳을 따라 다니는 유목민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러 있을 수록 그 곳 주민과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와 많아지고, 그러다보면, 그들의 문화와 습관이 아브람과 그 가족과 집안 사람들에게 묻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아마 그래서 아브람은 유목민의 삶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새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도 포함해서, 생계 수단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그래서 살기 좋고 편리한 곳에서 살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면 되었지,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대상이 되지는 않으리라 하는 동기와 목적에 따라 결정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실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따라서 생계의 수단을 선택하는 신앙인은 아직도 많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 가면서, 그분의 계획 속에 자신이 포함시켜진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세상과 인생을 보는 시각도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면서, 그분에 대한 믿음도 성장해갔고, 믿음의 성장과 함께 그의 생각 속에는 새롭고 영원한 가치관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땅은 인간을 위한 영원한 집과 고향이 될 수 없다는 것부터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큰 돈을 들여 좋은 재목들을 구해서 집을 짓는다 해도, 한 순간의 재해와 강도의 습격으로 다 잃을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일순간에 빼앗기고 없어질 수 있는 것에 자신의 에너지와 물질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에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실 것들이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들은 무너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쓴 저자도 이러한 아브람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 .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 . [아브라함과 그 아내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 . [이렇게 고백하였던 것은 이들이 저들의]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인데, 그 곳은 저들이 떠나 온 갈대아 우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그]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그 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 . .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히브리서 11:8-10, 13-16). [괄호 안에 삽입되어 있는 말들은 한국어 번역과정에서 상실한 문맥의 흐름을 회복하기 위해서, 불필요하게 번역된 말들은 제하고 그 자리에 제가 번역한 말들을 삽입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람의 생각과 마음 속에는 그 본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소원이 점점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본향과 그 곳에 대한 갈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새로운 본향을 가리켜서 세상의 본향보다 더 좋은 본향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히브리서 11:16) 이요, 이것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했던 아브람의 인생과 가치관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땅에 눈을 붙히고 살던 아브람의 눈이 땅에서 떨어져가며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의 조상의 모습이 여러분과 저의 믿음 생활 속에서도 확연하게 반영되고 있는지요? 믿음생활은 땅과 세상에 속한 가치관을 버리는 것을 요구합니다. 믿음생활의 목표가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로 들어 온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가치관만 버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완전히 버려야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주님이 요구하셨거든요.
사실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러분과 저 자신입니다. 잉태된 순간부터 죄에 의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마음과 몸의 안팎이 죄성으로 물이 들고, 죄의 습관들로 철저하게 훈련된 여러분과 저의 모든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여러분과 저를 단 한발짝도 하나님께로 그리고 하늘의 고향으로 내디딛는 것을 허락지 않고 뒤로 잡아 당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순종의 날선 검으로 끈질긴 죄의 소욕과 그 습관의 줄들을 무자비하게 잘라버리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하나님과 하늘의 본향을 향해 내디딜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것을 나의 모든 소욕이 원하는 것들보다 더 좋아하시나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세상의 것들을 얻게 되는 것보다 더 좋다고 정말 믿으시나요? 일시적이고 영원히 없어질 것보다 영원히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에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와 노력을 투자하시나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이 확실한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위해 영원한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히브리서 11:16).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은 그 도시 안에 여러분의 거할 처소를 짓고 계시구요 (요한복음 14:2).
아브람은 자신의 거처지를 세상 사람들 속에 두지 않고, 사람들이 뜸한 외딴 산간지방에다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또하나의 행동을 발견합니다. 자리를 잡은 산간지방에 자신의 거처를 위해서는 잠시 있다가 다시 거두어들일 장막을 치면서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으로 삼을 제단은 쌓고 있는 행동입니다. 제단을 위해서도 장막을 치지 않고, 제단은 돌들을 모아서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때에, 장막은 거두어서 매고 떠났지만, 쌓아 올려서 만든 하나님의 제단은 그대로 그 자리에 두고 떠납니다.
이것도 아브람의 생각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새로운 가치관을 반영하는 행동입니다. 세상과 땅,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은 다 일시적이고 언젠가는 쇠퇴하고 없어진다는 사실과 하나님과 그 분에 관한 것은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고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인 겁니다.
또한 이것은 아브람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와 정성을 자신을 위해서 투자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서 투자하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아브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께서 차지하시는 비중이 커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잠간 묵상하며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9절). 네겝은 가나안 땅의 제일 남쪽 지역입니다. 네겝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그대로 마르고 척박한 땅이라서 그랬습니다. 살기 어려운 고생스러운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도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땅은 주신다고 했더라도 그리 달갑지 않은 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경우를 당할 때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차라리 안주느니만 못하다구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달갑지 않은 땅도 가지라고 주시니 안받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짓궂은 분이라서 그러시는 걸까요? 그럴리가 없지요! 달갑지 않은 거라고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브람과 그 후손의 믿음과 순종을 위한 필수적인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선물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좋지 않은 것도 주십니다. 그런 경우는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시기 위함일 때도 있지만,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으실 때도 있습니다.
아브람은 척박한 네겝 땅까지 내려가서 밟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장막을 치고 살기도 했습니다.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한 땅에서 사람도 고생을 해야 했고, 집짐승들에게도 고생스럽고 위험한 시간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으니,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신 것으로 믿고 순종하며 감사하는 훈련을 환영했던 겁니다. 아마 아브람의 믿음이 네겝 땅에서 더 강하고 크게 성장하며 성숙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야고보서 1:2-4).
이렇게 하여,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땅을 후손들이 밟고 소유하기 전에 선조로서 먼저 믿음과 순종으로 밟고 다니면서, 상징적으로 모든 가나안 사람을 그 땅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것을 소유하여 거룩한 사람들만 사는 곳으로 만드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선조의 믿음과 순종은 먼 훗날 그의 후손들이 본받고 따를 믿음과 순종의 패턴과 그들이 영원토록 꽂을 승리의 깃발도 선조가 먼저 상징적으로 꽂고 있는 모습인 겁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서 죄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나의 승리는 내 자식과 그 후손들의 승리를 위한 본보기가 되어주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네겝 땅, 즉 약속의 땅에서 가장 척박하여 생존하기 힘든 땅에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 땅을 찾아가서 살았기 때문에 400년 후 그 후손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내 자식과 그 후손들의 믿음과 순종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책임과 사명을 마음 깊이 새겨 넣을 필요를 이 짧은 9절 속에서 배웁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신실한 믿음과 그 승리는 우리의 후손들이 저들의 발들을 그 위에 딛고 저들도 믿음의 신실한 길을 가며 승리할 수 있게 해 줄 발자국들이 된다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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