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_창12(5-7) 아브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신 하나님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Nov 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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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Nov 2, 2020
아브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신 것을 즉시 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중간에 주저 앉게 되었고, 하란이라고 하는 낯선 도시에서 아까운 세월을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시고자 했던 사람은 아브람과 그의 아내 둘 뿐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에 즉시 응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르를 떠나는 일행 중에는 아브람의 아버님과 조카도 따라 나서는 것을 봅니다.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실 곳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은 순종하면서도, "친척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 12:1)라는 말씀은 아직 따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면서도 침묵하시는 것을 보니, 반쪽 짜리 순종이라도, 가라는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도 좋은 시작이라 보신 것 같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던 길 중간 지점인 하란까지 왔을 때, 아브람의 아버지는 더 이상 가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계속 가야 하는 필요를 말씀드리며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무가내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가부장제 문화권에서는 부친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령의 부친을 홀로 외지에 두고 훌쩍 떠나갈 수도 없었을 겁니다. 결국 아브람은 발목이 붙들리고 만겁니다. 하는 수 없이 아브람은 거기서 모든 짐을 풀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은, 온 가족이 하란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란에서 정착하여 사는 아브람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란에서 얼마 동안 살았는지는 성경이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의 시간동안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쪽짜리 순종이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한 가운데서 많은 귀한 시간을 빼앗기는 것임을 배웠을 겁니다.
하란에서의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아브람에게 또 하나의 큰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엎친 데 덮치듯이 찾아 든 이 슬픔은 아브람을 더 고통스럽게 했을 겁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겠지요. 그러나 이제와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가나안 땅으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갔고, 자신도 어느새 75살이 된 노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르심을 따라 여기 이 시간까지 왔지만, 말씀하신 그대로 아닌 반쪽짜리 순종이다 보니, 결국은 가던 중간에서 더이상 못가고 주저앉아 버렸고, 아버님마져 외지에서 타계하시고 말았으니, 하나님께도 면목이 없고, 아내와 조카를 대하기도 부끄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인생 패배자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마져 접으려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때 아브람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자신에게 실망하시고 떠나신 줄 알았는데, 인생 밑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자신에게 찾아 오신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라는 것을 구약과 신약에 걸쳐서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복음의 메아리가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두 거대한 산 사이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한 순간의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변질된 인간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실망하시고 다시는 찾아 오지 않으시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먼저 이들을 부르시며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죽 옷을 만들어서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던 이스라엘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서 하나님을 배반하여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붙들려 간 후에, 서로에게 말하기를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났고, 이스라엘의 소망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하며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에스겔서 37:11).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골짜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마른 뼈들을 하나님께서 살아나게 하시는 환상입니다(에스겔서 37:1-10).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이 가지고 온 엄청난 고통과 손실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절망하고 포기하려고 했지만, 이들이 미처 몰랐던 것이 하나님은 이들을 포기하시고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전한 말씀을 에스겔에게 주셨습니다.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에스겔서 37:12-14).
베드로가 한 때 그토록 사랑하고 따랐던 주님을 한 순간의 두려움에 붙잡혀서 부인하고 말았을 때, 그는 자신의 추악함에 실망하고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을 겁니다. 며칠 후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신 증거를 그의 무덤에서 확인 했고, 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주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 앞에 자신이 배반하고 부인했던 주님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서질 않았을 겁니다. 더군다나 다시 그분의 사도로 세움을 받고 그분이 부활하신 사실을 전파하는 일은 더이상 꿈도 못꿀 일이라 생각하고 모든 걸 단념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를 디베랴 바닷가의 아침 식사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다시 전에 그에게 주셨던 그 섬김과 따름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란에서 주저앉아 있던 아브람을 다시 찾아 오신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일으켜 세워주시며, 다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람은 다시 용기와 소망을 얻고 일어섰던 겁니다. 그래서 중단되었던 아브람의 믿음과 순종은 다시 진행되었고, 그는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창 12:5)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년에 찾아 왔던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브람은 노년에 접어 들어서야 그 첫 단추를 제 구멍에 끼우게 된 겁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가고 많은 손실이 있었지만, 드디어 이 순종의 첫 단추를 제 구멍에 제대로 끼울 수 있었기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 후손을 물론이요, 오늘날 땅의 모든 민족들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겁니다. 처음에 순종의 방향은 제대로 갔지만, 말씀하신 그대로 따른 순종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에 많은 세월을 뺏겼고, 아버지 마저 객지에서 장례를 치뤄드려야만 했던 손실과 아픔을 겪고, 깊은 절망의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졌었는데도,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와 신실하신 사랑으로 인하여 아브람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를 수 있었던 겁니다.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연약해서 넘어지고, 실수하고, 실패하여 스스로 포기할 때가 많아도,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택하고 부르신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놀랍고 감격스러운 사실입니다. 우리도 수없이 낙심하고, 종종 절망의 계곡 밑으로 떨어졌더랬는데도, 지금까지 믿음의 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부르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셨습니다”(힙 13:5하). 주님은 우리가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죄를 따를 때는 서슴치 않으시고 무서운 징계를 내리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계획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오랜 세월을 허송하고, 은혜로 주신 삶의 귀한 것들을 망가뜨리고 잃어버리는 것을 보시며, 분노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시겠노라고 고백하신 것을 호세아 선지자의 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괄호 기호 “[ ]” 안에 삽입한 말은 말씀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제가 첨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도]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그런데도 나를 버린]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징계가 가져 올] 전쟁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성문 빗장이 부서질 것이다. 그들이 헛된 계획을 세웠으니 칼이 그들을 모조리 삼킬 것이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나를 배반하고,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그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 때 너희는 내가 너희를 영원히 버린 것 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호세아 11:1-9).
혹시 여러분도 자신이 너무도 오래동안 빈번히 믿음의 삶을 충실하게 살지 않고, 수없이 죄와 세상과 타협한 것에 스스로 낙심하고, 하나님께 돌아 와서 용서를 구하고 다시 바른 믿음의 생활로 돌아 올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은 돌아 오는 탕자를 무색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누가복음 15:20). 형제가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면 용서해주라고 하시고,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눅 17:3-4)고 하신 주님이신데, 다시 그 분께 돌아오는 여러분과 저를 외면하시겠습니까?
영어에 보면 “It’s never too late to do the right thing.”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진작에 했어야 할 옳은 일을 안하고 너무 오랜 시간을 끌어 왔으니, 이제와서 그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며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아브람의 모습이 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다가 중간 지점 되는 하란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곳에서 자리를 잡고, 너무 많은 세월을 흘려 보내는 동안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자신은 어느새 일흔다섯의 늙은이의 모습이 되어 버렸으니, 다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미련을 가질 염치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단념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도 지금까지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봐서, 자신도 모든 걸 포기하고, 조카 롯과 서로 의지하며 조용히 아내와 하란에서 살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하고자 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지금까지 침묵하신 것은 포기하셔서가 아니라, 아브람을 이해하시고 오래 참고 계신 거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믿음이 회복되어 다시 순종의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신 겁니다. 그 시간이 아버지의 타계와 함께 찾아 왔던 것입니다. 고향에 있을 때 찾아 오셨던 하나님이, 오래 전 순종의 발걸음을 멈추고 하란에서 세월을 보낸 늙은 아브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정한 시간이 되니까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많이 변했어도, 아브람을 처음 찾아 오셨을 때 보여주신 그분의 마음과 부르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나머지 가족과 함께 다시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순종의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었던 것이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창 12:5) 이를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해 오랜 세월 지연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순종의 발걸음을 옮기는 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고, 또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또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더라도, 다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그분의 뜻과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복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도 “마침내 가나안 땅에”(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 이를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몇 개월 전에 매일 큐티를 하며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그중에서 예레미야 33장에는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분의 백성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주십니다. 유다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끝까지 거역하며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고 패망하게 되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먼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고, 땅은 오래동안 폐허가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포기하시고 영원히 버리셨다는 생각을 갖고 완전히 절망하게 될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그분을 찾으면, 하나님은 그들의 잃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해 주실 거라는 소망의 약속을 선포하셨습니다.
“3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 . . 6 내가 이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겠고, 그 주민을 고쳐 주고, 그들이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겠다.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옛날과 같이 다시 회복시켜 놓겠다. 8 나는 그들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깨끗이 씻어 주고,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저지른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예레미야 33:3, 6-8).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소망의 메시지는 모든 시대 속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 즉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요, 복음이요, 약속입니다. 신앙 생활을 해오다가 게으름과 타협하며 느슨해지고, 죄와 세상과 타협하며 헌신과 순종이 멈춘 상태라면, 그래서 주저 앉아 있는 모습이라면, 다시 일어나서 여러분의 "가나안 땅"을 향해 순종의 발걸음을 내 디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래동안 희미해진 소망과 흐지부지해진 기도제목들을 다시 찾아 모으십시다. 우리는 한 때 간절히 소원하며 뜨겁게 구했던 것들을 얻기도 전에 포기하고 잊어 버렸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시 그분 앞에 엎드려서 그 중요한 소원과 기도제목들을 위해 다시 간절히 구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복주실 겁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해주실 겁니다.
아멘.
(아마 오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여기에 글로 작성한 내용이 오늘 말로 한 설교 내용의 첫 부분에 불과한 것임을 보실 겁니다. 오늘 말로 한 설교도 사실 다 끝내지 못하고 다음 주에 마치게 될 거구요. 모든 내용을 한 꺼번에 다 하려고 무리하는 것 보다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위로와 격려와 희망과 소망을 불어 넣어 주시는 귀한 말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더 알게 해 주시는 귀한 설교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