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8_창12(4-5)_말씀하신 대로 (그런데)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Oct 25, 2020
- 7 min read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4절)고 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장은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번째 문장은 방금 전 문장의 말씀에 의문을 갖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나는 거라면, 롯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명하신 말씀을 창세기 12장 1절에서 다시 확인해 봅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고 하셨습니다. 과연 아브람은 이 명령하신 대로 행하고 있는 걸까요? 하나하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가 살고 있는 땅 . . . 을 떠나서”. 아브람은 이 명령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네가 난 곳. . . 을 떠나서”. 히브리어로 “난 곳”은 태어난 장소와 그 곳에 있는 친척들을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아브람은 이 명령을 50% 만 행하는 모습입니다. 고향 땅은 떠나면서도, 친척인 롯은 데리고 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아브람은 이 명령도 부분적으로만 행하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좀 전에 확인한 것처럼 아버지의 집안에 속한 친척 롯을 데리고 가기도 했고, 창세기 11:31에 보면 아버지도 모시고 갔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아브람이 순종한 부분은 (1) 살던 곳을 떠나라고 하신 것 (2)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신 것 (3) 아버지와 조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집안 식구와 친척들을 두고 떠난 것입니다. 반면에 순종하지 않은 부분은 아버지와 조카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렇게 확인한 바로는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첫 문장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는 기록이 사실 대로가 아닌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원어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떠났다”라는 말의 의미는 ‘어디를 향하여 떠난다’ 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12장 1절에서 “떠나서” 라는 말은 ‘무엇을 또는 누구를 남겨두고 떠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확실하게 순종한 것은 아버지와 조카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을 두고 떠난 것과, 살고 있던 땅과 고향 땅을 두고 떠난 것이고, 마지막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곳을 향하여 떠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첫 문장은 바로 이 마지막 부분을 가리키는 문장인 겁니다. 두고 떠나라는 것 중에서 그렇지 못한 부분은 분명히 있었어도, 가라고 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디딘 것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떠난 것이 맞는 겁니다.
오늘 설교는 아브람이 순종한 부분과 순종하지 않은 부분은 분별하고 가려 내려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의 목적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다루시는 지를 확인하고, 실수와 실패가 거듭되고 실망과 낙망에 빠지게 되는 여러분과 저의 믿음 생활의 현실 속에서 위안과 소망을 발견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아브람도 처음 믿음을 가졌을 때에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순종하는 모습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두번째 문장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란은 아브람의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을 향해 600 마일 정도 오다보면 중간 지점 되는 곳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이미 우르를 떠났던 겁니다. 그리고 하란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었던 거구요. 그러나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을 향해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고향인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와서 있다가 이제 떠나는 건데, 하란에는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또 본문이 하란을 떠나는 아브람의 나이를 일흔다섯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가 고향 땅에서 하나님을 처음 뵙고 그분의 명령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지도 궁금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궁금증에 대해서 성경은 답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가 설교하면서 확인해주는 사실은, 아브람이 하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곳을 떠나게 된 겁니다(사도행전 7:4).
이 사실을 창세기 11:31도 확증해줍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처음 아브람을 찾아 오셨을 때의 장소는 그의 고향인 우르였는데, 그 때 아브람은 몇 살이었는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다만 그 때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그 고향 땅을 떠난 것만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 때 아브람은 아버지와 조카만큼은 떼어 남기고 떠나지 못하고 함께 길을 떠났던 겁니다. 그리고 여러 날을 힘들게 걸어 오던 중 하란이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연로하셨던 아버지가 너무 피곤해하시는 걸 보고, 차마 더 여행을 진행할 수 없어서 아버지를 위해 하란에 짐을 풀고 잠시 그 곳에 머물었던 겁니다. 머물 기간은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면서, 하란을 떠나지 못하게 되었고 할 수 없이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창세기 11:31하)고 합니다. 그러던 중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렇게 되니까 아브람은 다시 주님이 명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롯을 여전히 데리고 떠나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 두 장을 봅니다. 첫 번째 사진은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찍은 사진입니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롯도 같이 떠나는 모습이 찍혀 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하란을 떠날 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아버지는 더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롯이 여전히 같이 떠나는 모습으로 찍혔습니다.
두 사진은 다 하나님이 보기 원하셨던 아브람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는 거였다면, 첫번 째 사진 속에 아버지와 조카도 같이 가고 있는 모습이 찍히지 말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사진에는 조카의 모습이 찍혀있지 말았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 대로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면, 두 사진 속에는 아브람과 사래 두 사람만 찍혀 있어야 했던 겁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찍은 사진들 중에 막내가 어느 공원에 풀밭 위에 주저 앉아서 울고 있는 걸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형을 따라서 뛰어가다가 뭔가에 걸려서 넘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성환이 나이가 아마 세 네살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나이는 걷다가도 잘 넘어지는 때이니, 뛰다가 넘어지는 건 당연한 입니다. 그 후 세월이 지나서 24살이 된 지금은 뛰다가도 넘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돌벽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 오는 것도 수월하게 할 정도로 성장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나 어렸을 때에는 미숙하고 약하기 때문에 걷거나 뛰다가 곧 잘 넘어지는 것처럼,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도 믿음의 유년기를 거친 후에 그 믿음이 장성하고 강한 믿음이 될 수 있었다는 걸 말씀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아브람도 믿음이 성숙하고 강한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는 많은 실수와 넘어짐이 있었고, 성장하는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기는 했지만,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한 모든 부분에서 깔끔한 모습으로 순종하는 것은 그도 처음부터 못했다는 겁니다.
동질감과 위로가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아브람도 처음에는 저랬구나. 하나님은 실수하고 넘어지고 시간을 끄는 아브람에게 실망하거나 포기하시지 않으셨구나. 시간이 오래 걸렸어도, 오래참으시고 그 믿음이 장성하게 될 때까지 아브람의 손을 놓지 않으시고 도와주신거구나. 나에게도 소망이 있는 거구나. 나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 순종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믿음이 좋아지고 성장하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으십니까?
본문의 문맥 앞뒤 어디를 찾아 봐도, 하나님이 언짢아 하시며, 아브람을 책망하셨다는 구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람이 그가 살던 땅과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순종하여 떠나 온 것을 기뻐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두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 칭찬하신 거지요.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잘하지 못한 것은 못한거라고 지적하시는 거구요.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온전한 순종을 보이지 않았어도 명령하신 것 중에서 부분적으로나마도 순종하는 모습을 기뻐하셨고, 순종하지 않고 있던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하시고 참고, 아브람의 믿음이 자라서 순종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 주신 겁니다. 아브람의 경우 시간이 참 오래 갔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하란까지 온 후 그 곳에서 얼마를 살았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거기서 살았으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기간 동안도 하나님은 답답해 하지 않으시고, 이해하시고, 아브람의 믿음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죠. 사실 아브람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는 하란을 떠난 이후부터만 계산하더라도 25년이 더 흘러갔으니까요. 그리고 이삭이 자라서 그 아이를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칠만한 믿음이 되었을 때에는 약 15년 내지 20년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아브람은 그 나이 백 세를 훨씬 뛰어 넘어간 후에도 믿음의 성장을 위한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던 걸 봅니다. 여러분과 저는 더할 나위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이러한 긴 세월이 요구되는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하나님도 오래 참고 인내하시며 우리를 훈련시키시며 기다려주신다는 겁니다. 얼마든지 실망하시고, 화를 터뜨리시며 우리를 팽개치실만큼 우리가 형편없는 모습을 수없이 보여드렸건만,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는 사랑과 우리를 위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들고 계시니,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라는 표현 밖에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없던 우리를 사랑과 은혜로 찾아 오셔서 믿음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 장성할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자라도록 도와주십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립보서 1:6).
믿음이 성장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늘어가면서 그것에 대한 확신이 커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더 잘 알고 그분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록 그분에 대한 사랑과 신뢰도 더 깊고 강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성경읽기와 암송과 묵상으로만 가능한게 아닙니다. 그것은 눈과 귀로 읽고 듣고 깨닫게 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면서 얻는 체험과 경험으로 확인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머리로 깨달은 것들이 가슴 속에 깊이 파고 들어 와서 확고하고 견고한 믿음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두 번째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벧후 3:18) 라고 권면한 겁니다. 이 말씀에서 “지식”은 눈과 귀로 읽고 들으며 늘어 가는 지식, 즉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는 부분을 의미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의 교훈과 뜻을 따라 순종하며 실천할 때, 이에 따른 각양 열매들을 거두고 맛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머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성서적 지식이 늘어가고, 마음에는 이 지식을 실천하고 순종한 체험적 지식이 균형있게 병행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확신의 깊이와 강도가 더해지면서 장성한 믿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장성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평생 길이 만치 오래 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잘못 믿었던 것을 벗어 버리는 데에도 오래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과 사고방식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도 긴 시간이 요구됩니다. 더군다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곳의 거주민으로서 알아야 할 기본 지식과 운영방침을 배워서 몸에 베게 하는 것도 시간이 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더 정확하게 알고 더 깊이 알아가는 것 하루 아침에 터득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제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믿음 성장률이 만족스럽지 못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겁니다. 그렇다고, 여유를 갖고 느슨하게 믿음 생활을 하자는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입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늘 정신을 차려서 부지런히 노력해도 장시간 내지 평생을 가는 배움과 성장의 과정인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서 일초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벧후 1:5-8).
마지막으로 좀 전에 이야기했던 아브람의 사진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 사진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찎었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했나요? 가나안으로 떠나고 있는 일행은 오직 아브람과 사래만 찍혀 있어야 했던 거죠. 그런데 아버지와 조카가 함께 가는 모습이 찎혔죠?
이 사진을 보면서 두 가지를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믿음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명령하신대로 온전하게 순종하자는 겁니다. 아마 어떤 말씀과 명령들은 온전하게 순종하고 있는 것도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분적으로 순종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더욱 열성을 다하여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부분적 순종에서 온전한 순종으로 도약하시는 믿음을 갖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
둘째로는 믿음 생활은 믿음의 경주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주는 뛰는 겁니다. 빨리 뛰어야 이기는 경기입니다. 빨리 뛰려면 몸이 가벼워야 합니다. 경주에 임하는 선수들은 모두 옷들이 짧고 얇습니다. 신발도 가장 가벼운 것을 신고 뜁니다. 무게가 더해지면 속도를 낼 수 없으니까요.
성경이 믿음 생활을 믿음의 경주로 비유한 것은 우리가 벗어 던져야 할 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짐들은 대개가 우리의 어리석음과 욕심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격려와 응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이 증인들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모델들입니다. 11장은 이들이 저들의 믿음을 어떻게 지켰고 성장시켰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저들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모든 인생의 짐과 죄의 습관을 벗어 던졌다는 겁니다.),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히브리서 12:1).
말씀을 마칩니다.
믿음은 성장하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장성한 믿음이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걸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오래 참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 삼아서 믿음 성장에 게으르면 안됩니다. 믿음이 성장하도록 우리의 몫을 부지런히 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항상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려는 목표와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고 무겁게 만드는 온갖 무거운 짐과 죄의 습관들을 얼른 얼른 벗어 던지고, 달려가십시다.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창세기 말씀을 읽다보니 목사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신 기억들이 남아 전보다 이해를 더 할수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고 있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