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4주설교_창9(1,5-7)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Jun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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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 . 5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6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7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
아래는 1968년 12월 24일, 아폴로 8호의 우주 비행사들이 달이 공전하는 궤도를 돌다가 창밖으로 비쳐진 달 표면 위로 지구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프랭크 보먼: “오 마이 갓~ 저 아래 좀 봐. 지구가 떠오른다. 와우, 정말 예쁜데.”
윌리엄 앤더스: “(농담으로) 어, 찍지 마요. 그건 업무 밖인데.”
프랭크 보먼: “(웃음) 짐, 컬러필름 있어?”
윌리엄 앤더스: “컬러필름 한 통만 빨리 줘요.”
짐 러벌: “오 맨! 정말 멋지구나!”
윌리엄 앤더스: “빨리, 빨리 줘요.”
저는 위의 대화 내용이, 지구인들이 아니라 한번도 지구에 와 본적이 없는 외계인들의 대화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들이 큰 호감과 기대를 갖고 지구로 이민 와서 각각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1년 후에 다시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프랭크 보먼: “지구에 와서 살아 보니, 이곳은 정말 살기가 좋은 곳이라고 생각돼. 그런데 지구인들은 실망스럽더구먼…”
윌리엄 앤더스: “맞아! 지구는 정말 행복하게 살만한 장소야. 그런데 지구인들은 나도 무섭고 정이 붙질 않더라구.”
프랭크 보먼: “글쎄 말이야. 살고는 싶은 데, 지구인들이 워낙 살벌해서 계속해서 살기에는 너무 불안하다고 생각해.”
윌리엄 앤더스: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환경에서 왜 지구인들은 서로 싸우고 빼앗고 죽이는 걸까?”
짐 러벌: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다가도 그게 오래 못가더구먼. ”
윌리엄 앤더스: “우리 빨리 지구를 떠나자구. 우리도 끔찍한 일 당하기 전에 말야.”
이 대화 내용에 의하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난폭한 살인자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포함된 겁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지요. 지구에 그런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다 그런건 아니니까요. 우리까지 포함하는 이들의 판단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불쾌하고 분나게 하는 말이 되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정말 이 말을 들었다면, 당장 벌컥 소리를 지르며, 분을 발하겠지요?
“이보쇼! 나도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요? 아니, 내가 누구랑 싸웠다는 거요? 누구에게 내가 뭘 훔쳤다는 거요? 그리고 내가 누굴 언제 죽였다는 거요? 누구도 해친 적이 없는 사람을 싸움쟁이라고 하고, 도둑질도 하고 사람도 죽였다니, 무슨 당치도 않는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당신네 외계인들 눈알이 엄청 커서 모든 걸 시원하게 잘 볼거라 여겼더니만, 시커멓고 크기만 했지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막눈알들이구먼!”
그런데 여러분! 기실, 저 외계인들이 관찰한 여러분과 저의 모습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이 여러분과 저에 대해서 똑같이 말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전도서 4:4).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1-3).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로마서 3:9-18)
위의 말씀이 좀 심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의 발이 언제 “피를 흘리는 일”을 위하여 빨리 움직였단 말입니까? 확실이 여러분과 저에 대해 하시는 말이 아닙니다. 않그런가요? 하지만, 아래 구절에 있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며 생각해 보십시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복음 5:21-22).
우리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한 번도 성낸 적이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있었다면, 그건 정당성이 있는 의분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 속에서 끓는 분과 미움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잘 감춥니다. 겉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처럼 속 마음도 그리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종종 속에서는 분과 미움의 대상에 대해 벼라별 나쁜 생각을 많이 하죠. 그것이 여러분과 저의 영혼을 갉아 먹어 들어가며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속 마음을 그럴싸하게 감출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못 속입니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사무엘기상 16:7).
이런 주님이 보신 여러분과 저의 마음은,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은(제 각기 성격, 배경, 가문, 학력, 인종, 재력, 실력, 생김새는 다 달라도) 다 한결 같습니다. 악성 결입니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 3:12).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예레미야서 17:9).
홍수 전의 사람이나 홍수 후의 사람이나 변하지 않고, 악한 결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홍수 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창세기 6:5) 이들을 물로 쓸어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홍수 후에도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 (창세기 8:21)라고 진단하셨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여전히 악할 수 밖에 없다 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새롭게 한 땅에 사람들이 가득 차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7).
심각한 의문과 혼란이 생기지 않습니까? 깨끗하게 비운 지구를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다는 사람들로 다시 채우시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세상을 다시 죄악으로 가득 채울 거라는 사실이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이 다시 땅과 모든 생명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거라 하셨으니, 세상에 가득 찰 죄악은 홍수 전보다 더할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생존경쟁이 아니라 생사를 위한 결투가 될 것입니다.
홍수 전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창세기 6:11)고 했습니다. ‘무법천지’라는 말은 법이 없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질서와 평화와 안전이라는게 없는 세상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로지 무력 또는 꾀로 얻는 것이니, 폭력과 속임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약하고 어벙한 사람들은, 행복은 커녕 생명조차도 오랫동안 지키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 될 것이 뻔한데 어째서 하나님은 새로 깨끗하게 하신 지구에 죄악을 채울 사람들로 가득 채우라고 하시는 걸까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다행이도, 이 명령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새로운 법을 세워주십니다.
“5생명이 있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6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창세기 9:5-6).
사람이나 짐승이 사람을 죽이면, 그도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선포하십니다. 인류 역사에 사형제도가 처음으로 세워지는 순간입니다. 인간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지켜줄 수 있는 치안법이 생긴 겁니다.
‘홍수’는 인간의 극악한 죄악들에 대한 처벌을 하나님께서 직접 모두에게 한꺼번에 집행하셔서 세상에서 죄를 쓸어 버리신 사건입니다. 반면에 ‘사형제도’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하나님이 직접 하지 않으시고, 인간 사회가 그 권한을 갖고 적용되는 악인에게 집행하여, 세상이 무법천지가 되는 것을 막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세상의 죄를 직접 처벌하지 않으시고, 그 권한을 사람에게 양도하셨을까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 하나님은 홍수 이후 더 이상 그분이 인간의 악행에 대해 직접 그리고 한꺼번에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제사와 중보를 기뻐 받으시고, 그렇게 하기로 하신 결정이었습니다. 노아의 제사장 역할로 오늘 날까지 우리가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이유: 사형제도는 미숙하고 무책임한 인류를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인류로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우선, 다른 사람의 목숨이 내 목숨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배우게 해줍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값을 내 목숨으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듯 타인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고 자유를 즐기며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일이 말처럼 간단하고 쉬운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형수들 중에는 살인하지 않았는데도 인간의 실수 또는 다른 이유로 인해서 판결을 받고 사형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가족들과 아리조나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에서 유명하다는 툼스톤(Tombstone)이라는 타운을 찾아 갔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지를 돌아 보다가 어느 돌 무덤 위에 길게 세워진 비석에 적혀 있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습기도하고 기가막히기고 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Here lies George Johnson. Hanged by Mistake, 1882. He was Right. We was Wrong. But We Strung Him Up. And Now He’s Gone.”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읽는 거기 때문에, 유머스럽게 다가 오며 웃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 당시 사형이 집행될 때,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겐 얼마나 큰 비극이었겠습니까. 억울하기가 짝이 없는 일이죠. 기가 막힌 일인 겁니다. 실수였다고 사형당한 사람이 다시 살아 납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중에서야 사형수가 옳았고, 무죄한 그를 사형한 집행관들이 잘못했다는 것이 증명되었어도, George Johnson은 이미 억울하게 죽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번 죽이고 나면, 다시 살릴 수 없는 생명이니, 사형수가 정말 사형수인 것을 확인하는 일은 천하를 맡은 책임보다 중요한 책임인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라 하셨으니 말입니다. 이런 일을 홍수 이후부터는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책임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사형수까지도 행여나 억울한 경우를 당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목숨을 거는 것과 같은 책임감을 갖고 범죄를 다루고, 확실하고 공정한 판결과 집행이 되도록 하라는 뜻인거죠. 이런 책임을 맡고 나면 심사숙고하며 감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중하고 진중하고 사려 깊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실수없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과정 속에서 사람은 사회는 더 지혜롭고 성숙하게 되고, 인간의 생명과 삶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시각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곧고 바르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길을 배우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던 겁니다.
과연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얼만큼 이해하고, 또 이루고 있는 지…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각 공동체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맡은 책임과 임무를 수행하면서 과연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며 성숙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맡은 일에 충성하며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지혜와 공정하심을 닮아가는 관리들, 지도자들, 부모들, 시민들이 늘어날 수록 우리가 사는 동네와 사회는 모두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자신의 꿈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 되어 갈 겁니다. 그래서 사형의 권한을 비롯해서 인간이 인간을 치리할 수 있는 모든 다른 권세를 각 나라 정부에게 맡기신 것은, 두렵고 위험한 것이면서도, 인간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오게 해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게 되어,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어 드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도구로 주신 귀한 선물이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면 정부 기관의 일을 맡은 관리들과 총책임자(왕, 수상, 대통령 등)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거나 허락하신 그분의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모든 시민 또는 국민은 이들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속해 있는 나라와 주와 시의 법을 따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2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치안관들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두려움이 됩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4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은 여러분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13:1-4).
“13여러분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주님을 위하여 복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14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13-14).
“1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2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3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2:1-3).
물론, 신도로서 사회와 국가의 법을 거역해야 할 때는 있지요. 사회나 나라의 법이 믿음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는 경우에는, 국가의 고위관리들과 그 법 위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순종해야 하며,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믿음은 지켜야 하니까요. 오늘 날도 북한을 비롯하여, 중국, 이란,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 외에 다른 지역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고, 목숨까지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여러분과 제가 누리고 있는 신양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 자유국가와 사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박해 속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왜 서로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가 입니다. 6절이 설명하는 이유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경멸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동상이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동상은 실제는 아니어도, 실제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요즘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인종차별 반대시위의 열기가 오르면서, 옛날 남북전쟁 때 남부의 대통령이었던 Jefferson Davis 의 동상을 쓰러 뜨리는 일이 Virginia 주의 수도인 Richmond 에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동상을 쓰러뜨리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더 이상 그 사람이 이끌었던 남군의 목적과 이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영원토록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동상(형상)을 파괴하거나 쓰러 뜨린다면,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영원토록 믿지 않을 뿐 더러 거부하고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저는 사람을 죽이기 까지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6절의 말씀의 경고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는 않아도, 예수님은 살인과 사람을 말과 태도로 성을 내고 업신여기고 욕을 하는 것을 동일시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마태복음 5:21-22), 회개할 것과 앞으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야고보서 3:8-10).
아멘.

기가막힌 명설교 감사합니다 목사님.. 참 귀한 설교 말씀 저의 매일의 삶에 적용하고 살도록 몸부림치도록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목사님을 만난 저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