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7주일설교_감사하고 감사할 것 밖에(창세기 8:20-22)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May 17, 2020
- 6 min read
홍수를 겪는 동안 방주 안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 여덟 명이 체험한 충격을 상상해 봅니다. 자신들은 생명을 건졌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했을까요? 방주를 짓는 동안 아무리 설득해도 노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더니, 끝내는 홍수에 쓸려 가버린 동생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부친 쪽 친적과 모친쪽 친척들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마음을 찌르며 들어왔을 겁니다. 동시에 그토록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모르고 자기 주장대로 살다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만 이들의 어리석음과 고집에 대한 분노도 동시에 끓어 오르는 걸 느끼면서, 복통을 치며 통곡 하기를 한두번이 아니었으리라 생각을 해봅니다.
노아의 아내에게도 방주 밖에 동생과 언니 오빠들이 있었을 겁니다. 친가와 외가의 혈육들까지 생각하면서 고통스럽고 슬픈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을 겁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그래도 방주 안에 부모랑 저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와 있었고, 또 저들 삼형제 외에는 다른 형제 자매들은 없었을 테니, 직계 혈육을 잃은 슬픔보다야 덜 했겠지만, 그래도 그 친구들 이웃들 먼 친척들의 비참한 죽음이 적지 않은 슬픔과 충격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아내들의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친가와 외가 쪽의 친척들도 방주 밖에 있다가 다 홍수에 쓸려 가렸을 겁니다. 이들의 현실은 인류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없고, 수도 세지 못할 겹겹 초상을 당한 자들의 모습인 겁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는 날부터 적지 않은 나날들을 곡을 하며 지냈을 겁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이렇한 충격과 슬픔을 끌어안고 방주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을 보내는 동안, 아마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아도 할 수 있는 방주 안에서의 1년은 가장인 노아로부터 막내 아들과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인생 뿐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는 중요한 배움과 성장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방주에서 나오던 날에는 방주안으로 들어왔던 첫 날의 모습과 마음보다 많이 달라졌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홍수 후 전개 될 인류의 새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얻은 모습들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인류의 새역사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이 순간에 이들이 최 우선순위로 택한 일은, 홍수와 방주의 고통스런 훈련을 통해 깨닫게 된 가치관의 실제를 보여 줄 겁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누가 먼저 입을 열까, 그리고 무슨 말이 먼저 나올까도 궁금하고 호기심이 가는 주제인데, 흥미로운 것은 노아를 비롯해서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원채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 아들들도 말이 없는 걸까도 생각해 봅니다. 여하튼, 노아와 그 가족은 말들이 없습니다. 다른 식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인공인 노아는 입을 열만도 한데, 지금까지 말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도데체 무슨 생각이 그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걸까 하는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노아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그의 생각을 시원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노아의 모습은 믿는 자들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노아는 말보다 행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노아였기 때문에, 방주가 제 시간에 완공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에게 맡기셨다면, 백 날이 아니라 백 년이 가도 방주는 완공되지 못했을 겁니다. 듣는 것은 빨리 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하며,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는 노아입니다.
여하튼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도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린 모습이었습니다. 노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번제물은 짐승의 몸 전체를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입니다. 감사를 위해 번제물을 드리는 이유는 형식이나 의무적이 아니고, 하나님께 온 마음과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의 감격과 감사가 얼마가 크고 깊었을까를.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다 쓸어가 버린 무서운 홍수 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라곤 자기와 자기의 식구 여덟뿐이었습니다. 노아는 전인류가 왜 그런 죽임을 당해야 했는 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자기와 자기의 식구들도 같은 죽임을 당했어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자기와 자기의 식구들을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정말, 정말, 감사하고, 감사했던 겁니다.
그러나 노아의 제사는 감사의 제사만이 아니었습니다. 노아의 번제물에는 속죄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속죄는 죄에 대해 보상한다 또는 죄의 값을 갚는다는 의미입니다. 속죄의 의미 안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생긴 의의 분노를 가라앉힌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제사는 홍수에서 구원해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그리고 홍수 이후에 살게 된 노아와 그 아들들의 죄와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또다시 땅과 사람과 모든 생명체를 죽이시려고 또다른 홍수를 보내시고자 할 때, 노아가 이 날에 드린 번제물들을 기억하시고, 자비와 은혜를 따라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보여주십사 소원하는 제사장의 기도를 담은 제사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노아가 드리는 제물의 향기를 맡으시고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기로 다짐하신 겁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죽이지 않겠다.
땅이 있는 동안은 사람과 생물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주겠다.
하나님이 노아의 제사를 받지 않고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노아와 그 모든 후손들은 모든 생물과 함께 두번 째 대홍수에 의해 쓸려가 버렸을 겁니다. 그러나 노아의 제사를 하나님이 기꺼이 받아 주셨기 때문에 홍수 후의 세대가 홍수 전의 세대와 똑같은 죄성과 악을 지니고 있었어도, 오늘 날까지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노아의 제사가 속죄를 위한 것이지만, 그 효력의 영역은 현재 땅과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과 생물들의 생명, 그리고 천채에만 유효합니다. 그래서 땅이 있는 한, 하나님은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 땅을 저주하시거나, 모든 생물을 홍수로 또다시 죽이시거나, 사람과 모든 생물들이 지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지상의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실 겁니다. 반면에 자연의 세계를 초월한 영과 영원의 영역에서 효력을 발휘하여 사람의죄를 영원히 용서받게 해주고, 멸망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속죄제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 밖에 없습니다.
오늘 메시지 속에는 노아와 함께 우리 모두가 감사하고 또 감사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풍성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에 한 가지를 더 생각하면서 여러분과 저의 감사가 더 많아지고 깊어지기를 소원해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짐하신 첫번 째 내용을 보면,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셨던 이유가 사람이 악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려줍니다. 사람이 악하지 않았다면 땅이 저주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땅이 저주를 받지 않았으면, 사람은 땅을 일구고, 땅을 다루어야 할 때 땀과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노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은 사람이 일하는 대로 순순히 따르고 사람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신속하고 풍성하게 내어주도록 만들어진 겁니다. 따라서 이토록 크고 넓은 땅이 존재하는 것은 사람과 모든 생물의 필요를 풍족하게 공급해 주시기 위한 주님의 뜻과 깊은 사랑과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22절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의 깊이와 크기가 그 분이 만드신 무한히 넓고 큰 우주와 그 속에 넣어두신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며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계절이 계속 존재하겠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풍요로움을 계속 즐기고 맛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에서 생각이 그칩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시간이 일정한 속도로 변함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지구 대기권 밖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서 자기 궤도와 위치에서 이탈하지 않고 변함없이 일정한 속도로 자전 또는 공전을 하고 있는 달, 해, 행성 그리고 모든 별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구요.
광대한 우주 속 깊고 먼 곳에 있는 것들일 수록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나의 생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 왔는데, 그와는 달리 이것들이 모두 제 자리와 궤도를 지키고 일정한 속도를 변함없이 유지하며 공전과 자전에 성실해야 지구에 낮과 밤이 일정하게 반복되고, 사 계절을 정기적으로 갖게 되고, 농부들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시간에 맞추어 일하면서, 온갖 먹을 것들을 제 때에 넉넉히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이 작은 지구 위에서 먼지와 같은 작은 몸을 갖고 허덕이고 헤메며 제대로 인생을 살지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실수에 죄에 욕심에 악과 이기심까지 더해서 정말 때로는 짐승만도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시는 사실 앞에 놀라움을 갖게 됩니다.
특히 이토록 나를 향하신 주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이 저 우주만큼 깊고 크시며, 셀 수 없는 별들의 수만큼 무한하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도 나를 이만큼 사랑할 생각도 못했는데, 주님은 나를 엄청 사랑하고 계신는 사실에 생각이 닿는 순간 코 끝이 매콤할 정도로 찡해지고 눈시울이 불보다 뜨거워지며, 젖는 것을 여러분 모두가 자주 체험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을 갖고 보니, 시편 8편 3-4절에서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또는 딸)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기도합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노아의 제사를 기뻐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한 사람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는 이 세상을 주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따라 무서운 심판과 진노의 홍수로 벌하시며,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다 쓸어 버리셨던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이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모습을 보여주시고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홍수 시대 사람들에게는 저들의 죄 값을 홍수의 벌로 죽임을 당하게 하여 지불하게 하셨지만, 오늘 저희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시대를 허락해주시고, 우리의 죄 값을 우리로부터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의 외아들의 목숨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벌레만도 못한 죄인인데도 지상에서 사는 동안, 모든 필요한 것은 부족하지 않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시기 위해,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별을 만드셔서,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놓아 두신 것도 놀라운 지혜일 뿐 아니라, 이 죄인에게는 감당 못할 사랑이요 은혜이거늘, 이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늘 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시려고 외아들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 주셨으니, 이 죄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고,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시나이까?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억만분의 일이라도, 헛되게 받은 것이 되게 하지 않으려 구하오니, 이 죄인을 구원해주신 은혜 속에 담겨져 있는 주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